그날은 고관절 골절 수술 후병원생활을 마치고엄마가 퇴원하는 날이었다. 나는 처남집으로-라는 첫머리를 듣는 순간, 내 눈에 들어온 남편의 표정만으로 이미 화가 났다.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얼굴에 쓰인 언어를 읽을 수 있는 25년 차 부부였다.읽고 싶지 않은 문장을 얼굴에서 봐 버린 것이었다.
'왜 우리가?'
그날 이후 나는 엄마방에서 잠을 잤다. 우리가 일하러 나간 낮에는 혼자 워커를 밀고 다닐 수 있었지만 어두운 밤, 잠결에 일어나 화장실을 혼자 다니는 것은 위험한 상태였다. 그리고마치 건드리면 안 될 금기어처럼 엄마를 모시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도 남편도 꺼내지 않았다.현재 상황에서 모실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입을 닫아버렸고, 그런 내 모습에 남편도 아무 말하지 않았다. 겉보기에는 아무 일도 없어 보였다. 우리는 엄마 앞에서 쇼윈도 부부가 되었다.
그렇게 열흘쯤 지나자 나는 선언했다.
"나는 우리 엄마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내가 책임질 거야. 자기도 그렇게 알아! 그리고 자기도 생각해 봐. 내가 당신 어머니 모시면서 왜 내가 모셔야 하냐고 물은 적 있는지..."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구구절절 변명인지, 이유인지 모를 것들을 말했겠지만
'미안해, 내가 잘할게.'
도 아니었고,
'안돼. 이제 우리끼리 살고 싶어.'
도 아니었으니 아무 말도 안 한 셈이었다.
"자기 생각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는데..."
그 정도가 다였다.
말을 하지 않았던 기간 동안 내 안에 불이 일었다. 어느 날은 잔불이 이글거렸고 , 검불이 하나라도 들어가는 날에는 화라락 불꽃이 튀었다.
'내가 당신 어머니랑 함께 산 세월이 얼마인데... 내가 언제 어머니를 왜 우리가 모셔야 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던가? 내가 애들과 꽃놀이, 물놀이 갈 때면 어머니 빼고 간 적이 있었던가? 그런데 왜? 이제 겨우 한 달도 안 된 우리 엄마는 왜 당신에게 '당연히 모셔야지'가 안 되는 거지?'
곧 그 불에 내가 타버릴까 싶을 때 나는 통보를 했던것이다.
그때 우리는 결혼생활 25년 중 처음으로 둘만 살고 있었다. 아이들은 군대로, 학교로 모두 집을 떠나 제 갈길을 가는 중이었고, 치매를 앓던 어머니는 요양원에 계셨다.
지나고 보니 그것이 문제였다.우리는 결혼 후 오롯이 둘만 살아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주말부부로 시작한 우리는 한집에 살면서부터 지금까지 쭈욱 아이들과 어머니가 늘 함께였었다. 그런데 두 아들은 군대에 갔고, 딸은 멀리 학교에 있었다. 그리고 치매를 앓던 어머니 마저 요양원에 계셨다. 우리 둘만의 자유생활 겨우 7개월 차였다.
언젠가 아들이 그랬다
'엄마 우리 집이 요양원 같아...'
첫 요양원에 오신 분은 아버지였다. 우리 집에서 모신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들은 거의 매일 아버지를 보았다. 우리 집 근처에서 동생은 과외를 하고 있었고, 아이들의 과외 선생님이었다. 그리고 나는 매일 치매를 앓고 계시는 아버지 식사와 때로는 목욕을 챙겨야 했다.
그리고 두 번째 어머니.
어머니도 치매를 앓고 계셨다. 몇 년을 주간보호센터를 다니시다 다리를 다쳐 걸을 수 없게 되자 요양병원을 거쳐 요양원에 가셨다. 두 분을 경험한 상태에서 엄마까지 우리 집에 계시니 아들 눈에는 방한칸은 요양원으로 보였음직하다.
내가 당신 어머니를 받아들였듯 당신도 당연히 받아들여줘-
내 뜻은 그랬다. 내가 3남 3녀 6남매 중 제일 끝인 막내며느리로 당신 집에 들어왔지만 어머니와 함께 살았듯이, 2남 3녀 셋째 사위인 당신도 장모님과 못 살 이유는 없는 것이었다.
2년여의 시간이 지난 지금이라면 대화의 기술까지는 아니더라도 남편이 자주 말하는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할 말은 하는 그런 비법을 썼을 텐데 그때는 그것이 아니었다. 내 사고방식으로는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그때는 내 부모님을 내가 모시면서 친정부모님이라는 이유로 남편 눈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게다가 치매 앓고 계시던 시어머니는 남편의 손보다는 내 손을 더 필요로 했고, 엄마를 모시더라도 남편손이 갈 일은 별로 없을 터인데 같이 사는 불편함 만으로 ' 왜? '라는 질문을 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가 '여자가 말이야...'로 시작되는 것이다. 남자는 되는데 여자는 안 되는 그런 것들에 무척 예민했던 이십 대 후반쯤이었다.
나는 남도 바닷가 면단위에서 이제 겨우 시보딱지를 뗀 풋풋한 공무원으로 근무 중이었다. 그 해는 긴 가뭄으로 인한 한해 피해가 극심했다. 우리는 며칠 째 출근을 사무실이 아닌 담당마을로 했다. 그날도 양수기를 동원해서 논에 물을 대는 현장 업무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와 직원회의 중이었다.
"여직원들이 말이야, 정자나무 아래에서 쉬기나 하고 말이야, 일들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말씀이 길었다. 관내를 차로 한 바퀴 당신이 돌아보는 중 마침 정자에 앉아있는 여직원을 보았던가 보다. 그런데 그 모습을 여직원들이 일은 하지 않고 놀고 있다는 식으로 해석을 하고 있었다. 남직원들과 똑같이 양수기 호스를 잡고 논 바닥에 물을 대었던 나는 면장의 되풀이되는 말에 어느새 그분 앞에 서서 보고서를 내밀고 있었다.
"우리는 놀지 않았습니다. 보십시오!"
뒤에서 동료들은 옷을 잡아당겼다. 들어가 앉으라고 계장이 붙잡았다.
면장은 생각지도 못한 너무도 새파란 것이 대드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는지 회의를 얼렁뚱땅 마무리 지었다.
나는 동료들에게 '무식한 것이 용감하다'는 핀잔과 토닥거림을 함께 들었지만, 정도에서 벗어나면 들이받는 직원이 되었는지 생활은 좀 편해진 듯했다. 그 후로도 산불 끌 때 '여직원들은 뭣하냐'는 소리가 듣기 싫어 물통을 메고 직접 산을 올랐고, 해수욕장 개장 준비에 맞춰 해변가 청소를 할 때면 여직원이라는 보호 아닌 보호를 받지 않으려 땀을 흘렸다. 열심히 일하고 할 말은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다행히 나는 체력이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 결혼 후 우리 집에 다니러 온 엄마는 사위는 물론이고, 시어머니 눈치를 보았다. 나는 그 사실이 마뜩지 않았다. 어머니가 엄마보다 다섯 살이 많다고는 하지만 똑같은 사돈이라는 위치에서 엄마가 너무 조심스럽게 이야기하고 더욱 바지런히 내 집에서 움직이려고 하는 모습이 싫었다. 아들과 딸, 남자와 여자. 다름을 인정하지만 차별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당당히 말했다. 내가 당연히 받아들여야 상대도 수용할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당연하지!'를 외치지 않는 남편에게 서운했다.
우리 집에 어쩔 수 없이 살게 된 엄마는 기운이 없어서인지 손을 떨었다. 밥상에서 젓가락을 떨어뜨릴 때마다, 사레들려 재채기를 할 때마다 사위 눈치를 보았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는 나는 엄마에게 화가 났고, 스스로에게도 화를 냈다. 그 화는 때로는 남편에게 옮겨가 붙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한 엄마와 우리 부부의 동거는 2년 여가 돼 간다. 지나고 보니 부글부글 속 끓이던 날은 짧았던듯하고, 우리 셋의 생활은 보통의 일상이 되어갔다. 시어머니와 살 때처럼.
그리고 시간이 지나니 그때는 몰랐던 것들이 보였다.
엄마가 우리 집에 오셨던 날, 시어머니는 요양원에 계셨다. 남편 입장에서 보면 당신 엄마는 요양원에 계시는데 눈앞에 장모님을 모시고 있으려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으리라 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남편은 시어머니와 며느리인 나 사이에서 불편했던 듯했다. 내가 지금 장모님과 사위 사이에서 불편하듯이. 신경이 쓰이듯이.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내 마음에 불이 사그라들고 잔잔한 우물이 생겼을 때야 알았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엄마와 남편은 점점 상대의 성격을 파악하게 되었고, 나름의 인정 과정을 거쳐 서로의 모습에 크게 반응하지 않게 되었다. 시간은 예민함을 갉아먹었고 무뎌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내게 시어머니는 엄마가 될 수 없었듯이 남편에게 장모님은 그의 엄마가 될 수 없었다. 여전히 약간의 불편함은 남아있다. 인정하니 조금 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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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왔습니다! 어머니 심심할 때 드세요!"
저녁 퇴근길, 남편은 소주 한 병과 뻥튀기를 안고 들어온다. 우리는 "엄마랑함께 살기" 품앗이를 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남편이 불편할 때도 있다. 시어머니와 함께 살 때 남편과 나 사이에 껄끄러운 일이 있는 날은 며느리인 내가 거실을 피해 방으로 들어갔다면 엄마와 살고 있는 지금은 남편이 방으로 들어간다. 내편이 많은 사람이 거실을 차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