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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더분한 버마재비 Feb 27. 2024

장 담그는 날

메주 소금물에 흠뻑 빠지다


동네 입구에  들어서니 당산나무와  정각(亭閣) 둘러싸고 있는 금줄 흰 종이를  사이사이 물고 바람을 탄다. 희뿌연 하늘 때문인지 아니면 바람에 흔들리는 흰 종이 때문인지  신령한 기운이 감돈다. 

"보름날 당산제를 잡술라믄 느그 아버지는 왼새끼를 꼬았어야. 깨깟하게 해사쓴다고 손바닥에  침도 못 볼르고 꼬았당게. 느그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도 한허고 쓰던  금줄이 손때가  묻어가꼬  더 이상 못쓰게 생겼응게 몇 년 전에사 새시로  꼬아서 썼다드라."

정갈한  몸과  마음으로 당산제를  올려야 했던  제주(祭主)는 화장실을  갈 때마다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포도시 참었네!"

아버지의 말투를 흉내 내고는 웃었다. 당산제를  지내고  나서야  급하게 화장실을 가고, 좋아하시던 술도 드셨을 아버지에 대한 흉인지 그리움인지 모를 모녀의 수다는 끊길듯이 이어지길 반복했다. 내려오는 길, 당신 집으로  달려가는  엄마의  목소리에 봄물이 흐른다.


시간 되는 날이  길일(吉日)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말(馬) 날을 놓치엄마가 시원찮아한다. 결국  전부터  정월 대보름날이  말(馬) 날임을  확인하고 그날로 잡았다.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당산할멈에게 제를 올리며 정성을  다하듯 지난밤  모녀도 목욕을 마치고 고향에 내려왔다. 장을 담그기 위해서였다.


바로  언니 집으로  올라가는 모롱지길로 향했다. 첫 들머리 옥상에서도 장을  담는 것이 보였다. 어느새  엄마도 그 모습을  올려다보았는지  그 집 큰아들은  호스를 잡은 채  물을  받고 있으며, 셋째 딸과  사위쭈그리고 앉아 메주를  씻는지  고무통에 손을  넣고 있다고 생중계를 한다. 덕분에 나는 운전 중 잠깐 올려다본 그 모습을 모롱지길을  달리며 되짚어보았다. 아흔넷, 아짐은 이미 예순을  넘겨 머리카락이  희끗한 자식들의 손놀림이 성에  차지 않은 성싶다.  굽은 허리를 일으켜 엉거주춤한 자세로  한쪽 무릎에  손을 짚은채 남은 한 손은 곧 메주에  닿을 듯했다.  


"날이  새꼬롬헝게 빨리 시작해라!"

찌푸린 봄바람이 사나웠다.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수다를 떨고 있는 두 딸을 이제 아흔이 된 엄마는 등 떠밀며 내쫓았다. 이른 점심을 먹고 난 12시쯤이었다.

 우선  초록망에  담겨있는  메주를 꺼내  흐르는  물에  씻었다. 메주가 곱게 떠서  몸뚱이에  들러붙은  지푸라기를  떼어내고  먼지를  씻어내는  정도로  어렵지 않게 끝냈다. 내가  메주를  씻는 사이 언니는 수도꼭지에 긴 고무호스를 연결해서 늘어뜨리고, 최대한  장독대와  가까운 곳에 고무통을  두 개 가져다 놓았다.


이제 해묵은 것들이 창고 구석에서  먼지를  털고  나와  일할 시간이다. 

" 양철동우는 내가   각시 부터  쓰던 것이어야."

엄마 각시 때는  언제였을까?

"하도  오래되야서  기억도  안 난다만 저놈 양철동우를 산 뒤로 시암에서  물을  이어 날른디 얼매나 신속허던지... 양쪽에 손잽이가  있어갖고  머리 우게  올리기도  쉽고..."

우리 집  골목 끝에  자리한 샘골에서  골목길을 종종걸음 치는 쪽진 머리 각시.  짚으로  만든 둥근 똬리를 머리에 얹고  랑거리는 양철동이를  그 위에 들어 올려 인채 잰걸음으로  세월을 쫒았을 엄마.

하지만 이제는 둥근 테두리와 이음새 군데군데 녹이 슬어 대신할 물건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은 양철동이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여전히 몇 년에 한 번 얼굴을 내밀고 할 일을 묵묵히 해내고 있다.

 나무로 만들어진 네모난 됫박도  오랜만에  빛을 보며 소금을 품고  되질을 한다.

잊힐지도 모를 과정을 적기 위해 세세히 적어본다.

양철동이에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남기고  물을  담아  한번 부으면, 됫박에 소금을 고봉으로 담아 세 번 붓는다. 그 비율로 계산해서 한 고무통에 양철동이가 다섯 번  물을 쏟으면, 됫박은 소금 되질 열다섯 번을 해서 물에 넣어준다. 그리고 나면  이제 고추장을  담거나  콩을 삶을 때  얼굴을  내밀던 주걱도  한몫할 차례다. 장 담그기에  동원된  묵은 나무 주걱이  고무통 바닥에  가라앉은  소금을  휘젓느라  써억써억 소리를 낸다.

"응, 되았다!"

보행기에 앉아 감독 중인 엄마의 허락이 떨어져야만 두 딸은 다음 과정으로 넘어갔다.


 간수가  빠져 보송보송한 소금인지라  혹여 몰라  계란을  동동 띄워 500원짜리 동전만큼 머리를 내놓았는지  확인하고  염도를  맞춰본다. 얼추 맞는 것 같지만  엄마의 확인을  다시 받았다.

"잉, 되았다!"

 그다음,  소금물 안에  들어있는 불순물이 가라앉을  시간을 주어야 한다.(하루 전날 이 작업을 했더라면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뒤늦게 했다.) 흙물과 같은 찌꺼기가 밑에 가라앉는 것으로 볼 수  있었다. 가만히 윗물만 떠서 아주 가는 체에  밭쳐  둥둥 떠오른 티끌을  걸러내고  미리 항아리에 담아놓은  메주덩어리 위에  붓는다.

이제 나보다 먼저 세상 빛을 본 항아리가  나설 시간이다.  아버지가  읍내장에서  짊어지고  집으로 온 이후  장 담는 용도로 장독대에서  버티고 산지  적어도  60살이 넘은 항아리. 그곳에 마지막 화룡점정, 소독과 맛을 그윽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붉은 고추와  대추 그리고 검은  숯을  띄워 놓고 보니 색감이  참 곱다. 소금기가 묻은 항아리 겉을 닦아주고 주변 정리를 마친 후, 조릿대로  뜬 메주  머리를  꾸욱  눌러  소금물에  잠기도록 해주면 끝이다. 이제 두 달여 지나  장 거르기 과정을 통해 분리시키면  몇 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장과 된장이 된다. 



장담근지  이틀이 지난 날, 언니가 보내준 사진. 벌써  우러나온 장.

장을 담고  하룻밤을  묵기 위해  들어간  엄마집, 메주 묵은내가  가시지 않았다. 지난겨울, 엄마는 메주를  띄우느라 보름쯤 집에 머물렀었다. 그때 마실 나온  동네  할머니들은  맛난 내가  진동을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  집 나간  메주가  남긴  뒷향기는  쿰쿰하기만 하다. 매일  언니가  집에 들러  30분쯤  열어놓고  환기를  시킨다고 하지만  어림없는듯하다. 하루에도  몇 번을  들락날락하는 사람의  발걸음과  손길이 없는 엄마의 집은 한동안 쿰쿰한 냄새를 품고 있을 것 같다.


다음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랑비마저  추적추적, 밤에는 눈마저  내렸는지  아침에  일어나  마주한  먼  외약골 꼭대기에는 하늘과 이어진 구름 아래  흰 눈이 내려앉았다.

"저 외약골에  전봇대를  세우니라고  울 어머니가 며칠을  울역을  나갔던지...  멀기도  먼디 돌을  머리에  이어다가  날랐드란다. 나는  느그들  젖먹이니라  갈 수가  없어서  느그 아버지랑  할머니만  가셨당게."

엄마의 이야기는 금줄 사이사이 피어있는 흰 종이처럼 굼실굼실 끝이 없다.

하룻밤 묵은  몸에  메주냄새가 배었다.

당산 앞, 잠시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물 묻은  찬바람이 들어왔다.

느티나무를  지키는 정갈한  당산할멈의  배웅을  받으며 동네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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