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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더분한 버마재비 Apr 12. 2023

지난여름 오일장에서

산타할머니처럼  옥수수자루를  메고  밭에서  내려왔다. 사라진 길을 찾아 장화발로 풀을 옆으로 제쳐 꾹꾹 밟았다. 땅에서 더위 먹은 풀냄새와 흙냄새가 훅 올라왔다. 무성한 풀사이로 피어있던 풍년초 계란꽃이 더위를 물고 온몸에 덮쳐왔다.


산비둘기가  먹을세라 양파망으로  싸고, 태풍에  넘어질세라  줄줄이  옥수숫대를  엮어놓아서  이를  반대로 풀어내느라  애를 먹었다. 혼자  밤나무밭  그늘에  앉아 옥수수 껍질을  벗기며  짧은  옥수수  대뱅이를  꺾기까지  손이 참 더디다는 둥, 역시  별거 아닌데 혼자는 참  재미없다는 둥 혼잣말을 했다. 귓가에  앵앵  거리는  모기도 쫓아가며 짧은 노래도  몇 곡을 불렀다. 겨우 한 오십 개 옥수수를  자루에  담아  내려오는데  곁눈질로 본 작은  밭 도라지 꽃도 고개를 숙였다.


이튿날  여섯 시  반에  일어났다. 게으른  이 시골살이  어렵다더니  토마토주스와  요구르트로  엄마  시장기만  잠재우고  오일장에 가려하니 뒷집  아줌마는 벌써  버스를  타고  가셨다. 분명  내가  모시고  간다고 했는데...


일곱 시  조금  넘은  시각, 시장통에  들어서니  지팡이 짚은  할머니들  뒷모습만  보인다. 미장원  앞에  내려드리고  주차를  마치고  나오니  뒷집 아짐 대신  태운  동네 아짐은 천막을 치고  좌판을  깔려는 씨앗장사보다  먼저  플라스틱  의자를  끌어다  붙이고  배추씨를 고르고  계신  모양이다.

 

미장원에  들어가  벌써  파마가  끝난  할머니도  계신걸  보니  새벽부터  시작했나 보다.  우리 세대라면  입구부터  보고  들어서지 않을 것  같은 곳. 선풍기 한대로  더위를  물리쳐가며  가위질을  하는 미장원  사장님은  41년생. 누렇게 벽에 걸린  영업신고필증을  보니  그렇다. 미장원 입구 왼쪽에서 보리쌀, 비누, 황기 등등 좌판을  편 이는  미장원  사장님을  외숙모라  부르며,  사실은  팔십이라고  귀띔해 준다. 아무리  둘러봐도  머리 감길 곳이  안 보여  어찌  염색한  머리를  감기나  했더니  세월이  깃든  양은냄비와 싱크대가  그  몫을  해내고  있다.


같은 세월을  산 사람들만이  수용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공간. 습한  바닥에  짧고  까맣게 염색한 머리카락들이  쌓이고,  휠체어를  타고  온  어떤 할머니의  허연 백발이 쌓여갔다. 맞은편 떡방앗간에서 고소한  냄새가  난다. 얼음 동동  띄운 물에  타먹으면 최고라는 미장원 사장님 말씀에  함  사볼까 일어서는  나, 고개를  젓는  엄마를  봤지만 결국  샀다. 1킬로에  만원, 한 꼬집  집어  맛을 보니 꼬숩다.


파마를  말고  집으로  왔다가  두 시간 후  다시  미장원으로  가니  뒷집 아짐, 내 덕 좀 보자며 보리를  닷되 사신다.  등에  맨  가방엔  관절약, 혈압약, 어지럼증약 한 달분이 가득하다. 스티로폼 박스를 하나 사신걸 보니  그것도  팔 남매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부칠 용도인 것 같고, 보리도  엿기름을  길러  나눠줄 요량인듯하다.


장날이면  딱 하나  있는  의원에는  새벽  첫차를  타고  온  할머니들이  줄을  선다. 뒷집  아짐은 잠시  자리를 비우고  농협을  다녀왔더니 순번이  지났다고  다시  기다리라는 걸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고  통사정을  해서  겨우  한 보따리  약을  타왔다고  푸념하신다.


파마 후 염색까지  마친  엄마는  거울 속  모습이  맘에  드나 보다. 아이들이  못 보겠다고  머리 좀  하라고  하도  성화여서  왔다고 말은  그렇지만  허리시술 후  두 달이  지났으니  쑥국새처럼  자란  머리카락이  영 마뜩잖았던  모양이다.


흑백  시장통을 벗어나면서   내  어릴 적  오일장처럼 입구부터  일렁이는  사람들과 그릇가게 생선가게, 신발가게,  옷가게, 대장간에서   왁자지껄한  소리들이 넘실거리는 그때를  기억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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