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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더분한 버마재비 Apr 12. 2023

엄마는  걸음마 연습 중

가족요양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엄마  다 컸네. 이제  잘 걷네!

다리가 여섯인디... 바쿠가 넷, 내 다리가  둘이나 되냐...

행기를  밀며 걷던  엄마가 웃었다. 바람에 벚꽃 잎이 오소소 떨어져 나뒹굴었다.


봄볕이  연하고  순한 날이었다. 나는 산책을, 엄마는 운동을 나갔다. 오른쪽 고관절 골절로 들어앉은 지 2년이 코앞인 엄마의 걸음걸이는 돌배기 아이 같다. 왼 다리에 비해 눈에 띄게 가는 오른 다리는 반듯하게 걸으려 애쓰는 왼 다리를 자꾸 빈정거리는 듯했다. 엄마의  힘껏 내딛는 왼발을 오른발은 자꾸 안으로 휘어 눈을 흘기며 마지못해 따라다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엄마는 지팡이를 짚었다. 혼자서 걸을 수는 없었다.  곧 비칠거리며 쓰러질 것 같아 내 오른쪽 팔로 엄마 왼쪽 팔짱을 끼고 함께 걸었다. 그렇게 걷고 나면 내 팔도 엄마의 팔도 아팠다. 그래서  2주 전 장기요양보험 복지용구 급여비로 새 보행기를 샀다.


시골 엄마집에는 보행기가 있다. 허리시술 후 한사코 일하는 것을 말리는 가족들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엄마에게 형부가 10여 년 전 선물한 것이다. 하지만 쓰지 않았다. 그것은 엄마의  자존심이었다.  동네사람 어느 누구도 그런 유모차를 밀고 다니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엄마에게는  그것은 갓난아이들이나  태우고  다니는 유모차였다.  보청기도 하지 않았다. 보청기를 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지금은 시골 마을 회관 앞에 가면 보행기 몇 대가  허리 굽은 주인이 집으로 돌아갈 시간을 기다리며 서있다. 한 5년을 사용한 엄마의 유모차는  엄마와 함께 늙어버렸다. 그동안 흙 묻은 엉덩이와 메마른 손에 제 몸을  내어주느라 쇠약해진 보행기는 아무도 살지 않는 엄마 집 헛간에서 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엄마  올해 이 길은   처음이지? 작년 가을에  우리가  여기  나왔으니까.  그때는  바람이  너무  세서 추웠는데...

그때는  내 다리가  네 개이다가  다섯 개이다가  그랬제...

응? 네 개? 다섯 개?

힐체 타고 가다가 쪼까  걸었응께 글제. 힐체 탔응께 네 개, 니가  붙잡고  지팡이  짚고  걸었응께 다섯 개! 안그냐?

그런가? 아니제!  휠체어  타고  갔응께  여섯 개제?

아니여 힐체는 바쿠가 두개여서 네개가 맞당께. 가맹히 앉아있는 내 다리가 다리다냐? 있으나마나 헌  다리제...

ㅎㅎ 그런가? 울 엄마  겁나게 계산  잘허네!


새 보행기와 세 번째 외출이었다. 두 번은 남향으로 서있는 아파트 단지 안에  앞쪽으로 걸었다. 오늘은 뒤쪽으로 나있는 길로 나왔다. 엄마는 여전히 불안정한 걸음걸이로 보행기를 밀었다. 그리고 다리에 힘이 풀리면 그 보행기에 당신을 앉혔다. 쉬어야 했다.


아파트  뒤쪽으로 나있는  길을  걷다 보면 작은 공원이  있다. 아파트 입주와 함께  조성되었을 테니  나이는 열 살이었지만 공원 나무들은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버짐핀 아이처럼 서있다. 그늘을 만들 너른 품은 아직도 생기려면 한참이 걸릴 것 같다. 공원옆으로 기차가 다니지 않는 녹이 슨 철길이 있다. 그 윤기 없는 철도를 건너 30층 정도의 이웃 아파트가 그 공원을  내려다보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쨍한 봄볕과 달리 나무도, 철길도 작아지고 있었다.


그  공원산책로와 철길 사이,  흐르지 않을 정도로  물이  고이는  웅덩이 같은 도랑이 있다. 공원산책로와 철길을 사이에 두고 만나는 이 도랑 양옆 비탈면에는 화전을 일구어놓은 듯  주인을 알 수 없는 밭(?)들이 있다. 산책로 쪽 비탈면으로 양파, 마늘, 완두콩, 상추가  기워놓은  흥부네 이불처럼 여기저기 들어앉았다. '이 땅은   국유재산이므로  농작물 식재를 금합니다. 시청 도시숲계'라고 쓰여있는 현수막이 부질없다는 듯이 펄럭거리고 있다. 철로 쪽으로 만들어진 밭뙈기들은  자갈이 많아서인지  딸기만 보였다. 하얀 딸기꽃이  피어있었다. 거친  땅에서  꽃을  피우느라 이파리가  시퍼렇다. 눈으로  만져보니  이파리 질감이  거칠었다. 생명력이  바람을 타고  도랑을  넘어  내  얼굴에  닿았다.

 

뭣을 헌다냐?

우리 동네도 시방 눈 달린 사람들은 다들 저라고 있을 것인지...

엄마의 손가락 끝에 한 아주머니가 닿았다. 따뜻한 햇볕을 등으로 받으며 보리콩이 타고 올라갈 줄을 만들고 있었다.

엄마, 어제 보다  훨씬 낫네.

그냐? 아무래도  걸어쌍께  나아지겠제.

툭 끼어든 내 말에 엄마 눈에서  엄마가 살던 동네가 보일 듯하다 사라졌다.

다시 일어나 걸었다.


당산까지는  걸었으끄나?

응?

엄마는  다시 당신 집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우리 집에 오기 전까지 동네  할머니들 따라  운동할 때  항상  거쳐야 했던 곳 중 하나가 당산나무 였다. 엄마에게  엄마가 살던 동네는 무엇이든 기준점이 되었다.


느그집서 여그까지 걸었으면 한 당산나무깨쯤 안 되겄냐?

응... 그 정도  걸었을 것 같은데...

오늘 한몰댁하고 오전에 통화를 했는디 동네사람들 안팎으로 다 놀러 갔다더라.

어... 그랬대?

'한몰댁도 따라가지 그랬어' 그랬더니 '아이고 요런 다리로 어찌게 따라다닌당가' 글더라.

글제 다리도 불편하신디 댕기다 넘어지면 큰일 나제...

긍께 말이다... 그래도 한몰댁은 낫어야. 나보다. 그래도 혼자 집에서 밥은 끼래 먹냐 안...


산책로 양 옆으로  서있는 메타쉐콰이어 나무를 지나면 끝에 운동기구가 있는 넓은 광장이 나온다. 여기가 끝이다. 엄마는 집에서 나와 그곳까지 세 번을 쉬어서 도착했다. 그림자 마저 크지 않지만 제 딴에는 힘껏 서 있는  메타쉐콰이어 사이사이로  작은 딸나무가  끼어있었다. 주목나무와 참빗나무, 회양목, 중국단풍, 라일락, 영산홍, 흰 철쭉도  이름표를  달고  서있었다. 모두 엄마가 입으로 눈으로 읽는 바람에 눈에 들어온 것들이었다. 돌아오는 길도 세 번을 쉬었다.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이틀 연속 여섯 다리로  운동을 하던  엄마의 두 발바닥에  불이 났다.  쥐가 났다. 무리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날씨만 순하다면 다시 나갈 기세다. 정작 발바닥에 불이 난 엄마는 창밖에 날씨를 기웃거리며 다시 나갈 날을 기다리는데 나는 어이없게도 반갑지 않은 황사가 반갑다.  


엄마, 야물게 하시오! 그렇게 야문 손끝이 어디 가붔으까? 수건이 엉성허네...

나는 기껏 한다고 헌디 그래야...  그믄 안 헐란다!

아니,하지 말란 이야긴 아니고 그렇다는 것이제. 긍게, 잘, 응? 이렇게 꼭 꼭 눌러서, 야물딱스럽게 접으라고..

내가  그렇게  안 허냐?

응? 응, 이제  잘하네! 이렇게 잘함스롱...

가끔씩 집생각에 빠진 엄마를 건져내는 내 방식이다.


잔존능력, 요양보호사  공부를 하며 가장 머릿속에 박힌 단어이다.

"요양보호사 임무는 대상자의 잔존능력을 파악하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스스로 하도록 격려하고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은 요양보호사가 지원하는 것이다. 요양보호 대상자에게 남아있는 신체 잔존능력을 더 이상 사라지지 않게 격려하고  향상해  자기 효능감을  키워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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