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더분한 버마재비 May 17. 2023

흰 모란이 지던 날,

(1)

낭떠러지 끝이었다.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그곳에  나는  었다. 머리는'살려주세요'라고 외쳤지만 앙다문 입술사이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뭉개진 웅얼거림이었다. 누군가 밀어뜨린 것도, 스스로 뛰어내린 것도 아닌데 떨어져 내렸다. 두려움으로 응집된 몸뚱이는 공기와 부딪힘에도 둔탁한 소리를 내며 빠른 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래로 내달릴수록 두려움은 내 안에 바람을 집어넣었고, 나는 부풀 대로 부푼 풍선이 되었다. 그 와중에도 뭔가에 부딪힌다면 산산조각이 나기보다는 피시식 바람이 빠져 거죽만 남겨놓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안돼!'

보이지 않던 지붕이 갑자기 내 코앞에   나타났다. 잠시 시간도  나도  멈췄다.  필사적으로 내 몸은 바짝 웅크렸다. 그리고  두 팔을 크게 파닥거리며 겨우  솟아올랐다. 새처럼-결코 아니었다.  다리와 팔을 개구리헤엄 치듯 바짝 웅크렸다  그  반동으로  쭉  뻗어 머리를  디밀어 올렸다. 겨우 셀 수 없이  많은  지붕과  전봇대를  피해서  날 수 있었다.

' 아, 이건  꿈이지?  떨어져도 죽지 않아! 그래도 떨어지고 싶진 않아!'

현실과 접점이 맞닿는 순간, 가슴을 쓸어내리며  마지막 버둥거림 끝에 깼다.


꿈이었다. 

원인도 결과도 알 수 없는 꿈이었다. 어둠 속에서  일어나 보니  날개를  펼치며  날았던 탓인지  이불이 발끝에 널브러져 있었다. 오랜만에  비행이었다. 거의  꿈꾸지 않은  날이 없는 내게  날 수 있는 꿈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언제부터인지  내 꿈은 끝도 없는  추락이나  오색찬란한 곳을 날거나 하는 불가능을 실현시키는 곳이 아닌 또 다른  현실을   만나는  곳이 되어 있었다.


이불자락을  정리하고  일어나  앉았다. 지난밤  11시가  다  된 시각, 고향 후배 장례식장에  다녀오는 길이라며 걸려온 언니의 전화 때문 일 것이다. 밤길 지방도로를 달리다 옹벽에 부딪힌 는 한참 지나서야 경찰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고 다.  일찍 고향을 떠나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그는 십 년 전쯤 고향으로 돌아왔다. 같은 마을에  살았던  아내를 타향에서 만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던 것이었다.

나는  그를 중학교  다닐 적 모습으로만 기억한다. 하지만 아무도 오가지 않는 도로변,  까만 어둠 속에서 홀로 눈을 감았을 그를 생각하며 엄마와 나는 눈물을 훔쳤다. 엄마는  씨앗 한 점  떨어뜨리지  못하고  간  후배를  불쌍히 여겼고, 나는  남아있는  후배의  아내가  안쓰러웠다.


거실로 나와  핸드폰을  켰다. 바탕화면으로 깔아놓은  하얀 모란이  어둠 속에서  피어올랐다. 꿈이 시작도 끝도 어디인지 모른 채 갑자기 펼쳐졌듯이,  낮에 걷다가  들여놓은  핸드폰 속  하얀 모란은 그 너머  할머니와  H를 불러왔다.


내가  죽을 때도 그렇게  서럽게 울어다오 -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였으리라.  장구경을  좋아하던  나는 엄마를  따라  장에 갔다.  추운 날이었지만 시장은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시장통  어물전  아저씨는 갈고리로  홍어를  콕 찍어 들어 올려 보이며  싱싱한 생선을  고르느라  손가락으로 눌러보는 아줌마와  실랑이 중이었고,  손바닥을 마주쳐가며 '골라골라 '를  외치던  신발가게  노총각은 검은 봉지에  털신을 담아 노인에게  건네고  있었다. 시장 제일 안쪽에서 '펑!'소리와 함께  튀밥 냄새가  밀려와 내 코는 자꾸 벌름거리고 있었다. 정신을  쏙 빼놓는 광경을  구경하느라 발걸음이  버벅거리는  사이, 엄마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내  옆으로  요란한  노랫소리와 함께   두 손을  땅바닥에  짚고  엎드린 채  바퀴 달린  판자 위에 자신의 몸과 만물잡화전을 실은  아저씨가  지나가고  있었다. 검은 고무로 싸매진 다리 , 바구니에 몇 개의 동전이 던져졌다.


그곳에서  친구 엄마를 만났다.  나는  인사를 하고,  엄마에게  재작년  여름방학 때  놀러 가서  일박했던 그 집, 친구 엄마라고  소개를  했다. 짧은  인사가  오간 후  그분은 대뜸, '너 그 소식 알고 있냐?'  H의 죽음을 전했다. 그 분과 H는 한 동네에 살고 있었다.


 친구  엄마에게  무슨 말을  하고  그 자리를  떴는지, 옆에  있던  엄마에게  간다는  말을 하고는  왔는지  모르겠다. 어른거리는 눈 너머로 정류장이, 이차선 도로가, 징검다리가, 당산나무가  지나갔다.

마루에  앉아 계시던  동네  할머니들이  퉁퉁 부은  내 눈을  바라보며 휘둥그레한 질문을 하셨지만 나는  답도 없이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이상하게 여긴 외할머니는 따라 들어와 물었다. 뭔 일이냐고. 할머니  얼굴을  보자  더욱  서러워진 나는  할머니를  잡고 목놓아 울었다.

할머니 내 친구가 죽었대.

할머니는 나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시상에... 어쩌끄나...

나도 외할머니도 울었다. 그렇게 울다 지나는 결에 언뜻 들었다.

내가  죽을 때도 그렇게  서럽게 울어다오.


 그때까지 죽음은 구경거리에 불과했었다. 상여가 나가는 날은 '콩떡 먹는 날'이었다. 백여 가구가 살던 우리 마을은 아기울음도 많았지만, 그만큼 꽃상여가 나가는 날도 적지 않았다. 아버지는 상여가 나갈 때마다  맨 앞에 서 계셨다. 아버지는 요령을 들고 '이제 가면 언제 오나-'로 시작되는 만가를 메기는 선소리꾼이었다.

 "애기들은 가까이서  보는 거  아녀!"

호기심에 자꾸 상여 옆으로 다가가는 우리들은 어른들의 손에 이끌려 저 멀리 쫓겨나야 했고, 멀찌감치 서서 뒤꿈치를  들고  담장너머로 구경을 했다. 담장너머에는 키 작은 우리들 뿐만 아니라 동네 아줌마들이 코를 팽 풀어가며 치맛자락에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며칠을 섧게 울던 상주들은 상여가 나가는 날은 슬픔도 가라앉아버렸는지 상여꾼들의 어깨에 상여가 들리면 일정한 곡소리에 맞춰 움직였다. 그것은 마른 목소리였다. 그리고 동구 밖으로 나가는 길목에서 장지까지 따라가지 못하는 여자들이 마지막으로 바닥에 있던 울음을 토해냈다. 선소리꾼과 상여꾼, 그리고 상복을 입은 남자 상주들이 마을 한복판에서 장지로 떠나면 먼발치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사람들 손에는 콩떡 한두 개씩이 쥐어졌다. 죽음은 그렇게 만가에 섞인 곡소리, 꽃상여와 함께 콩떡 먹는 날로 기억되었다.


그런데 나에게 H의 죽음은 아니었다.

 

친구 H와  나는 초등학교는  달랐다.  군데 초등학교를  나온  아이들이 한 곳의 중학교로 모였다. 지금 생각하면  세 곳 모두 깡촌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가장 큰  초등학교였기에  우리는  좀 더  으쓱거렸고, 나머지  곳의  초등학교에서  온 아이들은  또 따른  세계의  아이들 같았다. H와 나는 1학년 같은 반이 되면서  만났다. 작은 키에  까무잡잡한  얼굴, 매부리코에  가까운  날카로운  콧날, 약간  사내아이처럼  저벅저벅 걷는,  눈에  띄는  친구였다. 정말  촌스럽고  아직  자기  의견이라고는  낼지  모르던 나와는  달리  친구는  자기주장이  강한 아이였다. 산골 촌뜨기였던  나는 5.18 민주항쟁이며, 대통령 이야기까지  할 줄 아는 그 아이가  너무 대단해 보였고  뭔가 정의로워 보였다.

 

노란색  상의, 다홍색 바지 차림 체육복 차림의 우리는 바위 위에  앉아  어깨동무를  한 채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소풍을  가서  찍은 것 같다.  바로  옆으로  큰 냇물이  흐르는  그곳, 모래 섞인 풀밭에서 할미꽃을 본 듯도 하다. 우리는  즉석  연극을  한 듯도 하고, 조약돌을  뒤집어 가며  보물 찾기를  했던 것도 같다. 자칭 일곱 빛깔 무지개라고  만든  일곱 친구 모임에서  어떤 아이가 좋아하는  남자아이를  불러내  왜 다른 여자를 만나느냐고  따질 때에도 H는 있었고,  교탁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교복 치마 안에 체육복 바지를  입은 채 말뚝박기를 할 때도  그 아이는 친구들 등위에 훌쩍 뛰어올라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떠났다.


중3이었다. 겨우 방 두 칸 있는  우리 집에  고모가  왔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던 나는 큰방  윗목에 있는  앉은뱅이책상 위에서  책을  한 아름 들고  작은방으로 가는 중  문턱을  으려다 쓰러졌다. 발바닥에  뾰족한 게  찔려  머리끝까지  밀려오던 고통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바늘을 밟아버린 것이었다. 엄마는 해어진 양말을 꿰매다 말고  바늘을 꽂아둔 채로 바늘상자에 넣어 앉은뱅이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내가 입고 있던 치렁한  월남치마 자락이 그 양말 꾸러미를 떨어뜨렸고, 나는 내 발로  바늘을  밟아버렸다.

내 비명소리에 부엌에서 고모의  저녁상을  준비하던  엄마가  달려왔다. 바늘이  부러진 상태였다. 그런데  바늘귀가 있는 부분은 부러진 채  발견되었지만 바늘 끝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고모는 살아생전 처음으로 방문한 동생네 집에서  저녁 한 끼도  드시지  못하고  집으로 가셨다.

 

고입선발고사(연합고사)를 마치자마자  나는 읍내에  있는  정형외과에  입원했다. 그런데 그 잃어버린 바늘조각은 찾지 못한 채 그냥  꿰매졌고, 하룻밤  자고  내일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의사는 말했다. 바늘이 피를 타고 돌다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사람들의 말은 실체를 알 수 없는 죽음에 대한 그늘을 내 마음속에 들여놓았다.

H는 그날 밤  제일 먼저  달려와준  친구였다. 병실문을  열고  달려와  그렁그렁한 눈으로  내  이름을  불러주던  친구였다. 그런데 그 친구가 아무도  모르게  세상을  떠났다.


아직 아주 이별하는  방법을  몰랐던  우리는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H의  집으로 갔다. 우리들을  보자  H의  이름을  부르며 애타게 우는 부모님을  뒤로하고, 서두르는 H의 오빠를 따라 동네 앞산으로 갔다. 그리고 무덤 봉분도 없이  바윗돌 하나로 남겨진  H를  만났다. 아무리 보아도  친구가  거기  누워있다는 것이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크게  울 수가 없었다. H의  오빠는  친구의  꿈이  간호사였다며  H의  몫까지  열심히  살아달라고  우리들에게  말했다. 


무덤으로 가는 길이었을까? 아니면 내려오는 길이었을까? H의 오빠는  내 이름을  부르며  누구냐고  우리들에 물었다. 어이없게도 나는 손목을 들어 올려 보였다. 나와 눈이 부딪혔지만 H의 오빠는 말이 없었다. 아무도 왜 묻는지 되묻지 않았다. 한참을 지난 후에야  나는 궁금했다. 왜 내가  누구인지  물었을까?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온 날, H는  내가  보낸  편지 봉투를  보고  오빠가  온 가족들에게  '울 집 막내, 남자친구한테  편지 왔다'라고  놀렸다며 웃으며 말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하지만 마지막 남긴 유서 속에  내 이름이  적혀있을 것만  같은  마음이  점점 커졌다. 그래서   오빠에게  왜  내 이름을  묻는지 되물을 수  없었다. H가  일 년 동안  찾지 않았던 나를 원망했을 것만 같아서 , 사실을  알고 싶지 않아  피하고 싶었다. 


그 후  십여 년이 넘도록 나는 꿈속에서 H를 만났다.

항상 중학교 때 그 모습으로.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그리고  십년 후  가을 어느 날,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작가의 이전글 멀리 두고 보아야 아름다운 것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