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 지나지 않은 두 살배기 딸을 업고 양손에 조막만 한 두 녀석의 손을 잡은 채 초등학교운동장을 항해 걸어가노라면 녀석들은 연신 인사를 해야 했다.
"안녕하세요?"
골목길 한쪽 작은 평상에 걸터앉아 볕을 쪼이던 주택가 할머니들은 그러셨다.
"아이고, 이쁘기도 하지!"
하지만 나는 내 뒷모습을 읽어내리는 그들의 시선이 마냥 즐겁지는 않았다. 년년년생의 아이들을 업고, 두 손을 꼭 잡은 채 어느 한 녀석이라도 다른 곳으로 튈까 봐 앞만 보고 걸어가는 내 모습은 육아에 지친 새댁,딱 그 모습으로 비쳤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몇 살인가?"
하고 물어오는 낯선 아줌마와 할머니의 질문에 아이들이 손가락을 펴 보이거나 나이를 말할 때면 내 발걸음은 더 빨라졌다. 어서 저기 있는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두 아이를 내손에서 내려놓고 좀 쉬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포대기 속에서 빠져나오고 싶어 꼼지락거리는 딸아이를 어르며,모래놀이를 하고미끄럼틀을 타고정글짐 속에서 노는 두 아이를 눈으로 쉼 없이 좇고 있었다.
그때 나는 셋째출산과 맞물려직장을 그만두고 세 아이의 엄마라는 새로운 직업 1년 차였다. 나만 초년병인 것은 아니었다. 큰아들은 친정에서, 작은아들은 시댁에서, 그리고 셋째인 딸은 내 뱃속에서 나와 가족이라는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으니 모두가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남편과 나마저 그동안 주말부부로 지냈으니 우리 가족은 딱 오합지졸이었다.
결혼 후 한 5년을 애가 둘이지만 자유부인으로 혼자 살던 내게 갑자기 닥친 남편과 세 아이의 식사와 빨래와 청소와 놀이는 시시포스의 형벌과도 같이 자고 일어나면 반복되는 굴레였다.워낙 낙천적이고 무던한 성격인 나였으나 이불속에서 가끔 괴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는 조합이었다. 각기 다른 곳에서 출발해서 한 곳에 모인 우리는 준비운동도 하지 않고 물속으로 풍덩 뛰어든 수영선수들이나 다름없었다. 모두가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다.
작년,작은 아들과 그곳에들렀다. 주변에 볼일이 있어 지나는 길이었는데 예전에 살던 그곳이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해졌다.
"이렇게 좁았어? 차 돌릴 수 있겠어요?"
우리들이 살았던 연립 공터에 들어가 다시 차를 돌리기 위해 후진하려고하는데 옆에 앉은 아들 녀석이 말했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세발자전거를 탔고 , 이어 두 발자전거에 도전했었다.그때는 너른 마당이었다. 심지어 오징어게임도 그려 넣을 수 있는 곳이었다.
한낮 햇볕 아래 누르스름한 낯빛으로 연립은 앉아있었다.모두들 일터에 나갔는지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그안에 아무런 생명체도 숨 쉬고 있지 않을 것만 같은 괴괴함이 짙었다. 페인트 칠은 벗겨져 너덜거렸고 빗물이 흘러내린 뒤 햇빛에 얼룩진 흔적이 곳곳에 머물러 있었다. 사실은 오래 전과 별반 다름없는 콘크리트 벽면이었지만 우리가 살다 빠져나온 뒤로 그 건물은 호흡을 멈춘 듯했다.
그 동네는 단독주택과 연립이 섞여있는 곳이었다. 우리는 세 개 동이 나란히 동쪽을 향해 서있는 연립, 가운뎃동 201호에 살았다. 동과 동 사이는 얼마나 좁았던지 앞동에서 나오는 압력밥솥 추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몇 동 몇 호가 부부싸움을 하는지, 된장찌개를 끓이는지, 김치찌개를 끓이는지까지도 대충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사생활 보호가 되지 않는다는 불편한 점 보다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일요일이면 공동청소에 참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껏 청소라고 해봐야 세 개 동 건물사이로 주차된 차량들이 서있는 곳을 빼면 청소가 끝나기까지 20분도 걸리지 않았다. 청소에 불참하면 내는 벌금 2천 원은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어쩌다 참석하면 물어오는 '왜 지난주에는 안 나왔느냐? 어디 갔었냐?' 하는 그들의 궁금증이 내심불편했다.
특히 잠투정이 심했던 딸 때문에 저녁이면 쉽게 잠들지 못한 나는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가지 않는 평화로운 아침에 단잠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이를 알던 남편은 그냥 청소를 나가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매월 몇천 원을 청소비로 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의 빗자루소리와 부산한 발걸음, 지난밤 누군가 토해놓은 흔적이나 쓰레기로 시시비비를 가리는 복닥거림은 누워서도 그곳에 있는듯한 착각을 일으키곤 했다. 특히 추운 겨울 이른 아침 들려오는 소란함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누워도 소용이 없었다.
아이들이 자라고 연립주민 연차가 쌓이면서 나는 청소에 불참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님을 감지했고, 불가피한 일이 아니면 참석하게 되었다. 아이들도 점점 자라나 내 꼬리에는 세 아이가 따라다녔고, 점차 나보다 부지런한 아이들은 세발자전거를 타고 청소를 나갔고, 어느 때는 내 대신 꼬막손으로 빗자루를 들고 먼저 나섰다. 나도 청소를 마치기 무섭게 삐죽 인사를 하고 내빼는 주민에서 가끔 마당 구석에 놓인 평상에 모여 투박한 언어를 아침공기에 녹여내는 그들 틈에 시나브로 끼었다.
우리가 살았던 옛 동네를 다녀온 이야기를 온 가족이 모여 앉은 날 꺼내보았다. 아이들은 그때를 이렇게 기억했다.
"기억나? 누워서 호-하면 하얀 김이 보였던 거?"
"비가 새서 옷장 밑으로 물이 새어 나왔던 거는? 그래서 도배 모두 새로 했잖아. 그때 엄마랑 아빠랑 도배하면서 싸우고, 다시는 도배는 내 손으로 하지 않겠다고 했던 거. 그 벽지 참 알록달록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촌스러움의 극치였지."
"엄마가 침대 위에서 뛰어놀라고 침대가 있는 벽면에 인형들 빨랫줄처럼 쭈욱 걸어놨던 것도 기억나."
"학교운동장에서 축구하던 것도, 줄넘기하던 것도, 문구점 앞에서 셋이 쪼그리고 앉아 뽑기 했던 것도..."
"형 친구집에 셋이 가서 놀았던 것도, 내 친구아빠가 목사님이신데 형이랑 동생까지 모두 가서 놀았던 것도..."
"그래도 다 좋았어."
끝이 없었다. 없던 것도 있던 것도 모두 그리움을 입혀놓으니 괜찮아 보였다.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은 102호에 살던 아이라고 우리는 입을 모았다.
102호는 젊은 아들 부부와 걸걸한 목소리를 한 엄마가 살았다. 그들은 우리가 집으로 들어오는 저녁이면 출근을 했다. 시내 어디선가 식당을 운영하고 있나 보다고 짐작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우리 가족 모두가 집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휴일이었던 것 같다. 아래층에서 나는 통곡에 가까운 아이 울음소리가 위로 올라왔다. 그러다 말겠거니 했는데 그치질 않았다. 101호는 아줌마 혼자 살고 있었다. 그렇다면 102호였다. 남편은 102호로 가서 우는 아이를 데리고 올라왔다. 아이는 빈집에서 혼자 낮잠을 자다가 깬 모양이었다. 아랫도리에 아무것도 입지 않고 긴 윗옷반팔을 입은 상태로 얼굴엔 눈물자국 범벅이었다. 처음에는 어색해서 징징대던 아이는 아이들 장난감을 가지고 제 집인 듯 놀았고, 한참 후에야 돌아온 102호 식구들에게 돌아갈 때쯤에는 더 놀다 가고 싶은 표정이 되었다.
그뿐인가? 옥상에서 고기를 같이 구워 먹던 202호 식구들, 붕붕 거리는 오토바이소리로 출근과 퇴근을 알리고 다녔던 풍채 좋은 아저씨와 부끄러워 우리에게 몇 마디 건네지 못하던 아줌마와 그들의 하나뿐인 순박한 아들.
우리 아이들이 그다지 부산스럽지는 않았지만 셋이었던지라 항상 쿵쿵거려서 죄송하다고 말하는 우리에게 애들은 그러면서 크는 것이라며 사람 좋은 웃음을 보여주시던 바로 우리 아랫집, 우리 동 대표 101호 아줌마.
힘들었던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 보니 괜찮은 날들이었다. 그날 아무도 살지 않는 것만 같아 보였던 무표정한 그 연립에는, 숨 쉬고 있지 않아 보였던 그곳에는 누군가가 살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때 그곳에 살았던 것처럼 지지고 볶는 일상으로.
프랑스 자수를 즐기는 친구가 있다. 여행 중에도 수틀을 잡고 대화를 하는 그녀 때문에 수놓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다.하나의 꽃망울을 만들기 위해 뒷면에는 실매듭을 하나 지어야 했고, 꽃다발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실매듭이 뒤쪽에 영글어 가고 있었다. 흰 바탕 위에 청초한 꽃수가 매끈하게 완성이 될 때까지 뒷면은 수많은 올망졸망한 실매듭이 지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모두 완성된 후 눈에서 멀리 놓고 보면 얼마나 괜찮던가!
때론 먹먹함이, 적막함이 아름다움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멀리 두고 보아야만 아름다운 것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