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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익균 Sep 29. 2019

만해가 동쪽으로 간 이유3

1)강원도의 인문지리적 특징과 강원도 불교


1)강원도의 인문지리적 특징과 강원도 불교

 

강원도라는 명칭은 강릉과 원주에서 따온 것이다. 양양군이 흥할 때는 원양도, 강양도로 불리기도 했다. 강원도는 관동이라고도 하고, 태백이라고도 하는데 관동은 서울과 함경도를 통하는 철령이 옛날에는 서울의 북쪽 관문이어서 북쪽 관문의 동쪽이라는 의미로 쓰인 것이고, 태백이라는 것은 강원도의 산하가 영동과 영서를 가로지르며 남북으로 뻗어 있는 태백산맥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는 데 기인한다.

강원도는 험준한 산이 전체 면적의 82퍼센트를 차지한다. 이중환의 택리지는 조선 중기 이후의 지역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고 있는데 택리지에서 강원도를 특징짓는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빼어난 경치이다. 이중환은 강원도, 특히 관동지방의 경치를 제일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해 팔도의 산수를 종합적으로 다루는 부분에서 관동 팔경은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자세하고 집중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이중환이 제시하는 강원도 산하의 이미지는 생산(이중환의 표현에 따르면 生利)보다는 관조를 위한 것이며, 은거 혹은 피난이 의미하는 것처럼 고립적이고 오지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라 평가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강원도는 산수를 금강, 설악, 오대, 두타, 태백 등 여러 산이 있고, 산과 바다 사이에는 명승지가 많은바 아름답지만 척박한 땅으로 표상된다. 택리지의 강원도편에서 드러나는 특징은 인물과 역사적 사건의 빈곤이다. 이중환이 다루고 있는 인물은 은둔 생활을 하던 주변적 인물이다. 또한 강원도 사람에 대한 인물평에 있어서 “산골 백성이어서 많이 어리석다”고 하여 유독 박한 편이다.

1907년에 작성된 『한국호구표』에서도 인구의 희박성은 변하지 않는 강원도의 지역성으로 확인된다. 당시 대한제국에서 인구수 10,000명 이상 도시 지역은 17곳, 인구수 5,000~10,000명인 곳은 40곳이다. 강원도는 10,000명 이상의 도시가 없다. 5,000명 이상의 도시는 원주, 철원, 이천 3곳이며, 춘천과 강릉의 인구 규모는 3,000~5,000명이었다. 지역별 인구 분포를 통시대적으로 보면 경상 전라 충청도 등 삼남지방에서 전 인구의 약 50%정도가 거주하고 있고, 황해 평안 함경도 등 삼북지방에 약 32%, 한성부와 경기 강원도 등 중부지방에 약 18% 정도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강원도는 5%정도에 한정된다. 강원도의 희박한 인구는 개화기에도 강원도가 주변성을 벗어나기 어렵게 했다.

이처럼 희박한 인구와 낮은 경제력은 1기 신문화 운동기의 다섯 학회 중에서 강원도의 관동학회가 갖는 위상에서도 확인된다. 당시 지방 출신의 유지자들과 유학생들이 교육진흥을 목표로 조직한 5학회로, 관서 해서지역의 서우학회(1906.3 ~ 1907.8), 함경도지역의 한북흥학회(1906.10~1908.1),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의 발전적 통합체인 서북학회(1908.1~1910), 전라도지역의 호남학회(1907.71910), 경기도충청도지역의 기호흥학회(1908.1~1910), 경상도지역의 교남학회(1908.3~1910), 강원도지역의 관동학회(1908.3~1910) 등이 있다. 각 지역을 대표하는 5학회 중에서 관동학회는 인물과 재정이 빈약하여 학보조차 발간하지 못하였다. 『대한매일신보』 논설에는 기호, 서북에 비해서 관동학회의 자본과 세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으며 서북학회 회원인 안창호가 관동학회의 연사로 초청되었다가 30원을 특별히 연조하는 모습도 눈에 띈다.

사립학교 설립 통계에서도 강원도가 1기 신문화 운동의 중심이 되기는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1909년 11월경 강원도에서 학부 인가를 받은 사립학교는 53개소였다. 강원도의 사립학교 수는 1910년 평안도의 일반 사립학교 414개교, 서울 경기의 경우 200여개교에 비하면 적은 편이다. 강원도의 낮은 개화 역량은 역설적으로 강원도 불교의 높은 개화 역량을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금강산 건봉사의 경우 1906년 8월 1일에 보통학교인 봉명학교를 건립하는데 건봉사는 그 외에도 강원, 선원, 염불원을 두고 있어 1기 신문화운동기 “지역사회의 문화 거점 역할”을 감당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강원도의 지역성은 인물과 역사보다 자연경관을 지배적 요소로 해왔다. 하지만 인물과 역사를 배제하는 ‘경치’가 아니라 인문지리적인 경관(landscape)에 주목한다면 강원도의 지역성은 달리 이해될 수 있다. 강원도의 인문지리적 경관은 인구를 제한하는 동시에 은거처로서 외지인들을 수용하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강원도의 문화는 토박이들과 외지인들이 함께 만들어나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강원도는 박해를 피해 이주하는 이들이 많이 찾는 곳이었다. 이는 강원도의 지형이 숨어살기에 좋은 산속이 많고 또 이들이 숨어살면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화전을 일구기에 적합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생활수단이 옹기를 구울 수 있는 흙과 나무, 그리고 물이 많은 곳이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강원도는 조선 후기에 박해받는 이단적인 종교 문화의 도피처가 되었다. 조선후기 경기도와 강원도의 접경지역은 ‘천주교 문화권’이었는데 신유박해 이후 80여 년간의 박해기간 동안 정부의 눈을 피해 강원도 곳곳으로 피신한 신자들이 다수의 교우촌을 이루고 그중 확대된 교우촌이 공소로 발전하여 풍수원 등과 같은 제도화된 교회로 이어졌다. 그런데 강원도는 “지난 선조(先朝) 무인년(1578) 에 황해도 지방에서 사학(邪學)이 생겨 거의 집집마다 사람마다 사당을 허물고 제사를 폐지하는 등 황해도에서 강원도에 이르기까지 그 신도가 많아져 중외가 자못 두려워하고 의심스러워 했”다는 기록에서 보듯이 천주교의 전래 이전에도 이단 종교의 잠재력이 풍부한 곳이었다. 개항 이전인 1860년대 강원도 횡성지방에는 다수의 천주교 신자가 형성되어 있었다. 1870년경부터는 강원도 영서지방을 근거로 하여 동학의 조직이 복원된다.

강원도의 인문지리적 경관은 박해를 피해 찾아드는 외지인들에게 신종교문화의 성소를 제공해 왔다. 물론 이들은 역량과 여건이 성숙해지면 좀 더 나은 환경으로 중심지를 옮기게 된다. 이처럼 많은 신종교들을 품어온 강원도의 인문지리적 경관은 그 자체로 산악신앙의 본향이었다. 고대사회의 대표적인 외래종교인 불교는 숭유억불정책에 의해 강제된 ‘산중불교’ 시대에 강원도의 산악신앙과 결합하여 상당 기간 동안 토착화되었다. 강원도 불교의 역량은 조선시대 불교 탄압에 의해 강화된 것인 만큼 불교 탄압이 사라지면 다시 약화되는 한시적인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강화된 강원도 불교의 상징지본은 금강산을 통해서 극대화되었다. 금강산은 현재 강원도 고성군과 금강군, 통천군에 걸쳐 있는 1,638미터의 산이다. 금강산에는 개골산, 풍악산, 열반산, 기달산 등의 이름이 있었는데 이 중에서 금강산이라는 이름은 『80권 화엄경』, 기달산은 『60권 화엄경』에서 유래한다. 금강산이라는 이름은 조선후기 화엄 연구가들 사이에서 청량징관의 『화엄경소』에 근거하여 자리잡게 된다.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이 자양분이 되어 강원도 불교는 산악신앙과 융합하여 새로운 종교적 상징성을 구축한다. 조선후기 및 대한시대 이래 불교 수좌들은 금강산의 마하연 선방으로 가서 한 철 나는 것을 전통으로 삼았을 정도로 금강산은 신앙과 수행에 대해 상징성을 갖는 공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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