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익균 Sep 29. 2019

만해가 동쪽으로 간 이유4

2)강원도 불교의 사격 및 근대지향성


2)강원도 불교의 사격 및 근대지향성

 

조선시대 강원도 불교의 사격은 매우 높아졌다. 불교를 지원한 걸로 알려져 있는 세조는 10개 사찰을 지정하였는데 유점사, 장안사, 표훈사, 건봉사 등 금강산 사찰이 4개나 포함되어 있었다. 강원도의 사찰은 왕의 어필을 하사받거나 왕실 부녀자들의 기복도량 역할을 하여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조선시대의 억불정책 속에서 불교 사찰들의 중요한 자구책은 왕실의 원당이 되는 것이었는데 가령 금강산 지역의 건봉사는 영조의 원당 사찰이었으며, 장안사, 신계사, 유점사, 표훈사 등도 왕실 기도처로 유명하다.

스크랜튼의 증언에서 알 수 있듯이 “과거의 것”에서 당대적인 것으로 재탄생해야 하는 구한말의 불교 잠재력의 상당 부분은 강원도 불교에서 나올 수 있었다. 구한말에 정부는 불교의 도성출입금지를 해제하는 한편 전국의 주요사찰의 관리체계를 재편하는데 이 과정에서 강원도 불교의 위상은 두드러진다. 특히 1906년에 건립된 불교연구회와 명진학교의 주도권이 홍월초에게서 이회광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주목을 요한다.

조선의 불교 정책은 ‘승군’을 관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조선 중후기에 북한산성에 있는 중흥사의 승군 도총섭이 팔도 도총섭을 겸임하는 제도가 있었고, 개항 이전에는 봉은사, 봉선사, 개운사(남한산성), 중흥사, 용주사 등 5개의 사찰이 전국 사찰의 승풍을 규정하는 5규정소 제도가 있었다. 이들 절은 조선시대 국책에 부응하는 사찰로서 불교계의 권력지형도의 중심에 있었다. 그런데 대한제국기에는 개화기의 급변하는 현실을 반영하여 불교를 관리하는 사사관리서를 두게 된다. 북한산성에 있던 중흥사 중심의 규정소 제도가 종료되면서 대한제국의 승려 및 사찰을 관리하는 세부 지침인 국내사찰현행세칙 36조가 반포된다. 36조에는 전국 사찰의 사격을 사사관리서가 있는 대법산(원흥사)과 중법산(각도 수사찰, 16개 사찰)으로 대별하였다. 이때 중법산에 포함되지 못한 사찰들이 중법산 상승운동을 벌리자 10여 사찰이 추가로 포함되는바 중법산 16사찰에 추가된 10여 사찰까지 포함하여 일제의 사찰령(1911)에서 정한 30본산이 결정되는 것이다. 중법산의 설정에 있어서 그 관할 지역의 사찰을 관리할 수 있는 제반 여건, 예컨대 교통의 요지, 재산상태 등을 고려하여 근대적인 관리체계가 세워졌다고 할 수 있다. 국내사찰현행세칙 36개조의 내용은 불교계의 자주적인 발전 가능성을 보장하는 면이 있었는데 불교계의 수장인 좌교정을 임명하지 않고 승단에서 선출하도록 한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홍월초는 1892년 남한 총섭, 1893년 북한 총섭이었으며 1902년에는 사사관리서가 세워진 원흥사의 내산섭리(서울 근교의 사찰관리를 책임지는 승려의 보직)를 거친다. 홍월초는 불교계를 관리하는 중앙 권력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대한제국의 말기인 1904년 1월에 규정소 제도가 폐지되고 그 관련 업무는 내부로 이관된다. 이때부터 홍월초는 화계사를 중심으로 활동하게 된다. 1906년에 홍월초는 불교연구회와 명진학교를 만드는 주축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불교연구회의 초대 회장과 명진학교의 초대 교장이 된다. 1906년 4월 10일에 홍월초는 이보담에게 불교연구회 및 명진학교의 실무를 인계하는데 1907년 1월경 홍월초가 1902년에 없어진 총섭에 다시 취임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홍월초는 불교연구회, 명진학교, 매일신보 지사 등 그가 담당하였던 제반 사무를 이보담에게 위임하고 있다.

이 시기에 조선 시대의 중앙 권력과 연계되어 있었던 홍월초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개화기 이후 정부로부터 자율성을 획득한 불교계에서 중앙 권력에 도전하는 지방 사찰들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 목소리의 진원지는 강원도 불교였다. 강원도 금강산의 건봉사 승려인 김보운은 승병, 즉 군문의 총섭이었던 홍월초가 문명개화의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급기야 1907년 6월 25일, 불교연구회가 신도들에게 ‘정토종교회장’이란 배지를 가슴에 달게 한 것 등이 문제가 되면서 불교연구회 총회가 열리고 홍월초와 이보담은 명진학교장 및 불교연구회장직을 사면해야 했다. 후임으로 건봉사 승려 이회광이 임명된다. 또한 1908년 3월에는 원흥사에서 경향 각지의 승려 대표 52명이 모여 한국 근대 최초의 불교 종단인 원종을 설립하는데 이때 이회광은 종정으로 추대된다. 이에 따라 학교의 운영권은 불교연구회에서 원종종무원으로 이관된다.

이처럼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된 이후 불교계가 근대적 종교로 일신해가는 과정에서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불교계가 세력 관계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강원도 불교가 그 중심에 놓이는 것이 확인된다. 근대불교의 새로운 세력을 대표하게 되는 이회광은 강원도 양양 출신으로 설악산 신흥사에서 입산 출가하였으며 여러 곳에서 수행한 이후 건봉사 주지를 역임한 부운의 법맥을 전수받아 33세 때(1894) 건봉사에 주석한 기록이 남아 있다. 홍월초에서 이회광으로 권력이 이동하는 것은 불교를 ‘승병’으로 관리하던 조선이 해체되면서 전국에 흩어진 각 지역의 사찰들의 자율적인 세력관계가 재구성되는 과정과 관련이 있다. 이 과정에서 일관되게 강원도 불교가 목소리가 부각된다. 1912년 6월에 30본사 주지회의를 통해 종지(宗旨)가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확정되고, 원종종무원은 ‘조선불교선교양종 각본산주지회의원(朝鮮佛敎禪敎兩宗 各本山住持會議院)’으로 재편되는데 이때도 이회광이 초대 주지회의원 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런데 이회광의 후임인 2대 주지회의원 원장(1913. 1~1914. 1) 역시 강원도의 유점사 주지 김금담(金錦潭)이었다. 김금담이 죽자 3대 원장은 다시 이회광으로 돌아가며 마지막 4대 원장은 강대련(1875~1942)이 된다. 강대련은 어릴 때 아버지 강주영이 강원도 간성으로 유배당하여 일가 모두 간성으로 이주하였는데 14세 때 고아가 되어 1887년 금강산 장안사에서 출가한다. 주지회의원 원장이 전원 강원도 불교를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개화기 이후 조선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한 지역별 30본사로 나누어진 불교계의 자율적인 목소리는 강원도 불교를 중심으로 모아지고 있는 것이다.

강원도 불교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지위는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이 전반적인 불교역량을 약화시킨 중에 상대적인 우위를 유지했던 것과 관련이 있다. 한용운이 강원도로 발길을 돌리던 1903년은 불교계가 강원도를 중심으로 근대적인 신종교로 발돋움하려던 시기였던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만해가 동쪽으로 간 이유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