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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익균 Sep 29. 2019

만해가 동쪽으로 간 이유5

3장 한용운과 강원도의 만남- 한용운은 강원도에서 ‘도사’를 만났는가



3장 한용운과 강원도의 만남- 한용운은 강원도에서 ‘도사’를 만났는가

1)1기 신문화 운동과 개화승의 전통

 

한용운은 1903년 서울로 가던 길을 돌려서 ‘도사’를 찾아 강원도로 간다. 전보삼은 만해와 관계 깊은 장소를 크게 세 곳 “육신의 고향인 충청남도 홍성의 생가와 정신의 고향인 내설악 백담사, 그리고 삶의 현장이었던 서울 성북동 심우장”으로 설명한다. 선행 연구에서 한용운의 삶의 현장은 강원도의 백담사 혹은 건봉사 등의 사찰로 한정되고 있지만 좀 더 시야를 넓혀서 강원도의 지역성이 청년 한유천을 불러들이고 길러내는 맥락을 이해할 때 근대 불교가 재구성되는 과정과 그 과정을 주도하는 주체로서 강원도 불교와 한용운이 놓인 위치공간이 해명되는 것이다. 강원도의 인문지리적 경관은 자신의 뿌리를 잃은 인물들이 은거하기에 적합하며 더 나아가 종교적 성소로서 기능해 왔을 뿐만 아니라 강원도 불교는 개화기 근대 불교 재구성을 추동하는 진원지였다. 서울을 향해 서북쪽으로 걸어가던 가진 것 없는 청년 한유천을 신문화 운동의 기념비적인 인물 한용운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은 강원도 불교의 근대 역량이었다. 한용운의 수업시대 즉 신학문을 접하고, 세계여행을 시도하고, 명진학교를 수료하고, 일본 유학을 다녀와서, 명진측량관측소 소장이 되는 이 시기에 한용운을 뒷받침한 것은 강원도 불교였다.

한용운은 ‘도사’를 만나러 강원도로 갔다. 1903년에 한용운이 떠올린 강원도의 도사는 넓은 의미의 개화승이었다. 1기 신문화 운동기에 개신교 계열의 개화 인물들에게는 선배 세대 가령 ‘독립협회의 3거두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가 있었다. 한용운에게는 누가 있었을까? 강원도 사찰에 은거한 개화승들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 개화기 불교계에서는 조선 사회의 낮은 위상을 벗어날 기회를 선구적으로 좇아간 인물들이 있었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 인물들이 개신교와 교류하기 전에 ‘개화승’들과 친불교적인 인물들을 통해서 신학문을 접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김옥균은 봉원사 강원에서 세계각국의 도시와 군대사진, 요지경 등을 볼 수 있었다. 서재필은 “이동인이라는 중이 우리를 인도해 주었고 우리는 그 책을 읽고(1년 이상) 그 사상(개화사상)을 가지게 된 것이니 새절(봉원사)이 우리 개화파의 온상이라고 할 것이야.”라고 하였는데 당시 범어사, 화계사, 백담사, 불영사 등의 강원은 신학문의 수용과 그 교육으로 유명했다. 이들 개화승은 근대 최초의 일본 불교 포교사 정토진종 승려인 오쿠무라 엔신과 능동적으로 교류하여 신학문을 알게 되었는데 초기 개화기의 조선인은 일본 불교에서 불교 자체보다는 일본이라는 근대국가에 주목했다고 한다. 초기 개화기 개화승의 다수는 건봉사, 백담사 등 강원도 사찰 출신들이었다. 1873년 대원군이 민씨 세력에 밀려나고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개화의 주도권은 기독교로 넘어간다. 개화당 인물들이 초기에 개화승과 교류하다가 개신교 세력과 손을 잡게 되는 과정은 개화 운동의 지형도가 바뀌는 조류를 보여주는 것이다. 승려의 도성 출입이 가능해진 것은 1895년이지만 현실화된 것은 1900년대로 보이며 사사관리서가 1902년 4월에 생기지만 제 역할을 못하고 1904년 1월에 없어진다는 점을 볼 때 1903년의 불교계는 아직 각 지역 사찰의 역량을 서울로 집중시키기는 힘든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강원도 사찰들은 강원도로 피신해 온 뿌리 뽑힌 청년들을 수용하였으며 이들 중에 다수가 신학문을 접할 기회를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용운은 1903년 오대산의 월정사에 잠시 머물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설악산의 백담사로 옮긴다. 한용운은 1905년 1월 26일 당시 백담사의 조실인 김연곡(金蓮谷)을 은사로 모시고, 전영제로부터 계를 받는다. 이 중 은사인 김연곡은 건봉사 출신으로서 한용운에게 양계초의 『음빙실문집』과 서계여의 『영환지략』(1848)을 소개한다. 한편 한용운은 세계지리지인 『영환지략』을 읽은 것을 기화로 백담사에서 1년 만에 하산해서 세계일주를 시도하기도 한다.

한편 한용운은 1905년 4월부터 백담사에 머무르던 건봉사의 승려 이학암에게 반야경과 화엄경을 수학한다. 한용운이 1906년에 설립된 명진학교에 편입하는 것은 이학암의 추천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명진학교는 1906년 4월부터 전국의 본산에서 청년 승려를 각 2명씩 선발하여 전통 불교학과 신식의 근대학문을 절충하여 교육시킨 2년제 학교였다. 여기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각 본산의 강원을 수료해야 했다. 만해는 정식 강원을 수료한 대상자가 아니었으므로 명진학교의 2년제 정식 과정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그 보조과에서 공부하였을 것이다. 보조과는 강원 사교과 정도의 수료자를 대상으로 3개월~1년 정도의 교육 과정으로 측량학과 일어를 속성으로 전수하였고 이에 더해 매일 참선과 근행을 2시간씩 하도록 정하였다. 보조과의 교과목이 측량학과 일어 2과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한용운이 일본 유학을 중단하고 돌아와서 명진측량강습소 소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한편 명진학교를 수료한 후 한용운은 1907년 4월 15일부터 건봉사 내 무불선원에 입방하여 선수행을 하고 건봉사의 정만화에게 법을 인가받으면서 용운이라는 법호를 받는다. 1908년 2월경에 한용운은 유점사로 들어가는데 1908년 4월경 유점사의 서월화 강백으로부터 화엄경을 배운다. 그리고 유점사의 말사인 신계사의 보운암에 주석한 서진하 (1861~1926년)에게 수학한다. 서진하는 일본 조동종의 불교사절이 금강산에 방문하자 만해를 일본으로 가도록 주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진하는 강원도 고성군 수동면 수잠리에서 출생하여 1872년 12세 되던 해에 금강산 신계사에서 석주 상운(石舟 常運)스님에게 의지하여 득도, 사미계를 수지하였다. 이후 금강산 유점사의 벽암 서호(蘗庵 西灝)스님에게 구족계를 받고, 대응 탄종(大應 坦鍾)선사의 법을 이었다. 그 뒤 10여 년간 제방에서 설두·용호·탄응 스님 등 선지식들로부터 경문을 사사하고 1886년 신계사 보운암에서 처음 강의를 열어 유명한 대강백이 되었다. 서진하는 1911년 속리산 법주사 주지를 맡아서 1914년 11월 25일 ‘불교진흥회’를 설립할 때 30본사 주지로서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불교진흥회는 이회광이 30본사 주지회의원 원장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이에 반발해 만든 조직이다. 이회광은 30본사 주지들과 일반인 및 유생들을 결집하여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강원도 불교는 근대 불교를 세우려는 불교계의 흐름을 선도하는 위치에 있었으므로 그 한계로부터도 자유롭지 않았다. 한용운의 수업시대는 일본불교를 선진불교로 인식하고 일본불교의 제반활동을 보고 충격에 빠져 일본불교를 모방하는 시기에 이루어졌다. 조동종과의 관련 속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만해 역시 문명과 불교 발전이라는 시대적 화두를 안고 있었다. 한용운은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 일본 조동종 청년들이 주축인 화융회 기관지 『화융지』에 12편의 한시를 1908년 6, 7, 8, 9월호에 기고하였다. 한용운은 일본의 조동종 대학에 입학해 일어, 불교사상, 서양철학을 배웠으며, 천도교에서 유학 온 최린과 인연을 맺는다.

한용운은 일본에서 돌아오자마자 1908년 10월의 승려대회에 참석하고 이회광이 설립하는 명진측량 관측소 소장이 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회광은 명진학교를 세운 주축인 불교연구회의 주요인물이었으며 건봉사 출신의 명사이기도 하다. 건봉사 승려의 자격으로 명진학교에 편입한 한용운은 이회광과 교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용운의 수업시대를 이끌어 준 강원도의 승려들 즉 ‘도사’들은 초기 개화기의 개화승 계보의 잃어버린 고리라고 할 수 있다. 3.1운동이 있은 1919년 11월에 ‘일본의 포교 방법을 배우고 일선융화를 도모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일본으로 건너가는 이회광의 모습은 최초의 개화승으로 알려져 있는 이동인이 일본 불교 포교소를 스스로 찾아가 정토진종의 교리서인 『진종교지』에 감탄하여 포교술을 배우려던 모습을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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