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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익균 Sep 29. 2019

식민지 조선의 위험한 아방가르드1




 

 





 

김종한은 『문장』 (1939년 8월)을 통해 정지용의 추천을 받으면서 마지막 등단 절차를 마무리한다. 김종한은 1937년에 도쿄의 일본대학 전문부 예술과에 입학하였으며 학생시절부터 『부인화보』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1940년 졸업과 동시에 정식으로 입사하였다. 1941년 8월에는 『부인화보』를 나와서 아카사카의 해양문화사에 입사하지만, 1942년에는 식민지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고 같은 해 2월 『국민문학』 편집을 맡는다. 이때부터 김종한은 다수의 친일시와 친일적인 산문을 쓰게 된다. 한국 문학사에 각인된 김종한의 이미지는 세 가지인바 임종국에서 시작된 친일문인으로서의 이미지, 조건부 대일협력론인 ‘신지방주의론’의 평론가로서의 이미지, 시대적 한계 내에서 민족주의적인 저항을 ‘시도’한 문인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친일과 관련한 이미지가 너무 선명하다 보니 그동안 ‘시인 김종한’을 시사(詩史)적 맥락에 놓고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일은 용이하지 않았다. 이번 논문은 1차적으로 김종한의 ‘민요론’을 통해 그가 일본 유학을 가기 전에 보여줬던 초기 창작활동과 그 이후 매진한 순수시 사이에 놓인 단절을 메우고자 하였다.

김종한의 민요론의 진의는 당시 유성기 음반을 통해 판매되는 유행가요, 특히 전래 민요(김종한의 표현으로는 토민 민요)와 창작 민요인 소위 신민요를 그 한계까지 투시하고 ‘도래할 민요’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김종한은 민요론을 쓰면서 자신의 초기 창작활동과 반성적 거리를 두게 되었고 더 나아가 순수시에 진력할 수 있게 되었다.

김종한의 초기 창작활동과 후기 순수시 창작을 관류하는 흐름은 참여 의식이었다. 김종한의 사회 참여의식은 청소년기 ‘건전한 유행가요의 민중화’라는 이상에서 출발해 ‘미적 혁명’의 시대에 ‘시민사회 정당성 상실과 가치 영역들의 붕괴를 보상하려는 미적 교양의 프로그램’이 구현된 괴테의 모범을 따라 순수시의 길로 접어든다. 하지만 김종한의 순수시론은 미적교양의 프로그램에 내재하는 ‘유기적인 목적론’의 한계에 봉착하자 “아방가르드들의 정치적인 자기 방기”로 수렴되면서 친일의 논리와 아슬아슬한 길항관계에 놓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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