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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익균 Oct 20. 2019

만해가 동쪽으로 간 이유6


강원도의 지역성은 서울을 향하던 청년 한유천을 한용운으로 호명하였다. 이 호명에 대답하는 한용운의 수업시대는 1기 신문화 운동기로 수렴된다. 1919년 3.1운동의 33인 민족 대표 한용운은 예외적 개인이 아니라 1기 신문화 운동 기간에 성장하던 신종교- 즉 ‘강원도 불교’의 주체성이 구현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주체였다는 점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한용운은 초기 개화기에 두각을 드러낸 바 있는 개화승의 가능성과 한계를 계승하여 신문화운동의 주역으로 떠오르게 된다. 한용운은 일본의 힘을 빌어서 개혁을 이루려는 ‘일본식 서구주의’의 전통에서 출발하였다. 1910년에 집필한 ‘중추원 헌의서’와 ‘통감부 건백서’, 그리고 불교유신론은 한용운의 수업시대에 형성된 신학문의 이해를 대변한다.

‘강원도 불교의 힘’은 개화기 개화승의 계보 속에서 새로운 청년들을 길러내었다. 자신의 고향에서 뿌리 뽑히고, 서울에서 정착하지 못하는 청년들은 강원도의 인문지리적 경관 속으로 들어와 은거하였으며 이들 중에 신학문의 교육을 받고 서울로 혹은 일본으로 유학갈 기회를 갖게 되는 청년들이 있었다. 한용운은 이 뿌리 뽑힌 청년의 이름으로 신문화운동기의 주역으로 성장한 것이다.

강원도 불교의 특별한 힘은 조선시대 500년간의 억불정책 속에서 조성된 ‘산중 불교 시대’의 특수성에 기반한 것이므로 불교에 대한 억압이 사라지면 해소될 수 있는 것이었다. 강원도 불교는 불교의 근대화를 선도하였지만 그들이 주도한 근대 불교가 ‘산중불교에서 도회불교로’ 나아감에 따라 스스로 주변화된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서울에서 학교와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상도의 삼본산의 경제력이 더 중요했다는 점에서 점차 근대 불교는 경상도 불교로 중심을 옮기게 된다. ‘한용운의 수업시대’ 이후 이회광과 한용운의 중심적인 활동 무대는 ‘서울을 매개로 한 경상도 불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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