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인이 대면한 이율배반과 자유의 이행-한용운 시의 근대성과 관련하여
1장 서론
『님의 침묵』에 수록된 한용운의 시를 사랑시로 읽을 때 이 시들은 근대적 사랑의 실제와 한계를 현시한다. 1920년대는 소위 ‘연애의 시대’였는데 당시 ‘연애’는 오늘날의 ‘남녀간의 사랑’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한국어에서 ‘사랑하다’는 원래 ‘생각하다’는 뜻이었지만 그다지 자주 쓰이는 표현은 아니었다. 기독교의 전래이후 ‘사랑’은 신의 사랑이라는 뜻으로 널리 쓰이게 되었고, 신에 대한 사랑과 비슷한 용례로 국가에 대한 사랑이 함께 쓰이기도 했다. Love의 번역어로서 사랑이 남녀의 사랑으로 쓰이게 되는 것은 1920년대로 보인다. 하지만 1920년대에는 복합적인 의미를 갖는 ‘사랑’이 아니라 남녀간의 사랑에 한정한 ‘연애’가 더 많이 쓰였다. 근대전환기 근대적 개인의 출현은 사랑(연애)이라는 화두를 통해 접근할 수 있다.
“연애는 인생 최고의 선이요 미”이며 “예술”이라는 진술이나 “아아 강렬한 자극 속에 살고 싶다”는 토로가 보여주듯이 근대 문학은 사랑의 움직임에 대한 문서고이다. 본고는 이러한 문서고에서 한국 근대시사의 주류적 경향에 거스르는 사랑시로 한용운의 시를 살펴보겠다.
한용운은 강화도 조약(1876년)에 의한 개항 직후인 1879년에 태어난 최초의 ‘근대 청년’이었다. 한용운은 1900년대에 본격적으로 근대 지식을 접하고 짧은 기간이지만 일본유학을 거친 후 1913년에는 『불교유신론』을 상자한다. 삼일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한 후 1920년대에 돌연 자유시 『님의 침묵』을 상자하여 놀라움을 자아낸다. 1920년대는 새롭게 출현한 청년들이 주도하는 ‘연애의 시대’가 태동하고 있었다. 한용운은 근대적 사랑의 문화적 표현을 통해서 1920년대 문학청년들과 다른 근대성의 지층을 구성하는 데 참여하였다.
이번 논문은 한용운이 최초의 근대 청년인 동시에 1920년대 연애의 시대에 기성 세대의 대표성을 갖고 있었음에 주목한다. 소위 세대론에 기대면 왕년의 청년이 기성세대가 되었을 때 어떤 갈등이 야기되는지 예단하게 되기 쉽다. 하지만 한용운은 근대성의 복합적인 측면의 중요한 일부를 견지하면서도 새로운 청년 문화와 대화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은 ‘어른’이었다.
이번 논문은 한용운의 시 「인과율」과 「자유정조」를 매개로 하여 이러한 대화의 성과를 밝히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