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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익균 Nov 05. 2022

일제말기에서 해방기로-동양론의 변용

일제말기 동양론과 해방기의 동양론은 담론의 위상이 다르다(스피노자-들뢰즈를 참조하면 원인은 기원이라는 고정된 시점이 아니라 결과와의 관계에서 변용affection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제 말기 동양론이 ‘사상이면서 동시에 이데올로기’일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일종의 지배 담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방기 동양론은 식민 잔재로 그치지 않고 새로운 주체들에 의해 대안 담론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해방기에는 “중국 대륙을 겨냥한 제국주의적 동양 담론은 해체되고, 태평양 바다를 향하는 새로운 동양 담론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오문석, 『현대시의 운명, 원치 않았던』, 앨피, 2012, 160쪽.]

이철승은 동아시아 담론이 유럽의 아시아 지배를 위한 제국주의적 전략에서 시작된 이래, 20세기 전반기에는 일본 제국주의와 중국 중화주의의 실천 도구로 활용되었고, 현재는 근대 문명의 문제를 해결할 대안 찾기의 일환과 동아시아 지역 연대를 통한 세계중심으로의 진입 등 다양한 목적의 추구를 위해 광범위하게 논의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변화는 동아시아 담론이 역사를 초월하는 고정적인 이념이 아니라 역사 진행과정에서 형성되고 변화해 온 이론이므로 담론의 주체가 누구이며 담론의 헤게모니를 누가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주된 흐름이 결정되었음을 보여준다.[이철승, 「‘동아시아 담론’과 중심주의 문제」, 『중국학보』52집, 2005. 참조.]

함석헌은 1948년 서울 YMCA 일요 모임에서 동양 사상 강의를 시작했다. 와세다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김흥호는 해방기에 위당 정인보가 세운 국학대학에서 철학 강의를 하던 중 학생들이 동양 사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자신의 무지를 부끄럽게 여기게 되었다고도 한다.[김흥호, 『(다석 유영모의) 동양사상과 신학-동양적 기독교 이해』(김흥호전집3권), 솔출판사, 2002.]

이처럼 해방기 동양론은 이미 지배 이데올로기의 위상을 벗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즉 동양론이 이데올로기로서 강요되었던 신체제기를 벗어나면서 근대 이후 지속되어 온 동양 사상에 대한 세 가지 관점 주체적 해석론, 동서 절충론, 전면 부정론[김갑수, 「한국 근대에서의 도가 및 제자철학의 이해와 번역」, 『시대와철학』제14권 2호, 2003, 216쪽.]은 다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주체적 해석론의 경우 해방 후 김용배, 배성룡에게서 보수성을 띈 채 계승된다. 동서 절충론의 경우 ‘동도 서기’의 근대적 버전인 단순 절충론과 사회주의적 절충론으로 나뉜다. 전면 부정론의 경우 일반적으로 서구적 근대와 동양 사상은 조화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지만 해방기에는 반공주의와 결합한 특유의 전면 부정론도 발견된다.


서창제는 “덮어놓고 노장을 예찬하는이들이 있어 玄奧하다느니, 고원하다느니 하는 온갖 추상적형용사를 붙이기에 애를 쓴다. 마는 이는 오로지 자기의 사상적 저능, 비판결여를 자증할뿐이다.”[서창제, 「노자사상과 공산주의」, 『백민』, 1949.3, 14쪽.]고 포문을 열었다. 서창제의 반공적 전면부정론이 발표되는 시점이 남한단독정부 수립 이후, 미군 철수 문제와 중국의 내전을 의식하는 1949년이라는 점은 ‘노자사상’이 갖는 당대성을 드러내는 유의미한 지점이다. 서창제의 논지는 남한단독정부 수립 이전 해방기에 만연했던 노자 사상을 ‘사회주의적 절충론’과의 관련 속에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노자의 사상을 서구의 급진사상과 관련지어 부정하는 논의는 해방 이전에도 알려져 있었다. 「중국사상계의 신현상」(『동아일보』, 1923년 5월 19일)은 중국 국민당 호한민의 「맹자와 사회주의」를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노자의 학설은 무정부주의”라고 하여 “우리국민당은 좌관하기 난한 바”라고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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