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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익균 Nov 06. 2022

춘향유문의 계보학

서정주의 춘향유문의 계보학

부활 / 서정주


  


내 너를 찾어왔다 순아. 너 참 내 앞에 많이 있구나. 내가 혼자서 종로를 걸어가면 사방에서 네가 웃고 오는구나. 새벽닭이 울 때마닥 보고 싶었다. 내 부르는 소리 귓가에 들리드냐. 순아, 이게 몇만 시간 만이냐. 그날 꽃상여 산 넘어서 간 다음 내 눈동자 속에는 빈 하눌만 남드니, 매만져볼 머릿카락 하나 머릿카락 하나 없드니, 비만 자꾸 오고…… 촉(燭)불 밖에 부흥이 우는 돌문을 열고 가면 강물은 또 몇천 린지, 한 번 가선 소식 없든 그 어려운 주소(住所)에서 너 무슨 무지개로 내려왔느냐. 종로 네거리에 뿌우여니 흩어져서, 뭐라고 조잘대며 햇볕에 오는 애들. 그중에도 열아홉 살쯤 스무 살쯤 되는 애들. 그들의 눈망울 속에, 핏대에, 가슴속에 들어앉어 순아! 순아! 순아! 너 인제 모두 다 내 앞에 오는구나.


서정주는 1930년대의 시 「부활」에서 ‘저주받은 일상에서 벗어나는 어떤 충격을 경험하게 하는 맑은 하늘의 위력’을 보여준다.

1940년대에 서정주는 이러한 시세계를 변용시켜서 동양적, 우리의 호흡에 딱들어 맞는 형상으로 재탄생시키는데 현대적 일상 서울, 광화문 거리에 하늘의 기운이 흘러넘치도록 만든다. 우리 일상 속에 그 하늘이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다.

해방기 동양 사상이 갖는 당대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방기 서정주의 소위 ‘동양적 시세계’가 갖는 역동성을 검토해 보자. 서정주는 1942년에 “동양에 살면서도 근세에 들어 문학자의 대부분은 눈을 동양에 두지 않았다.”고 비판하면서 동양 고전을 읽을 것을 요구했었다. 이와 관련하여 해방기에 쓴 서정주의 첫 자작시 해설 「일종의 자작시 해설-부활에 대하여」를 읽을 수 있다. 이 글에서 서정주는 주역의 ‘雲行雨施운행우시’에 대한 관심을 서술하고 있다. ‘雲行雨施’는 『주역』의 건괘에 대한 해석인 「단전彖傳」의 일부이다. 1927년에 풍우란(馮友蘭)은 「단전彖傳」을 비롯한 「역전」이 자연주의 철학에 속한다고 지적하였고, 이를 받아 이경지는 “건곤 두 괘에 대한 단전의 이해는 노자에게서 왔을 뿐만 아니라, 노자의 사상을 통해서 단전을 봐야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용어들은 대개 장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구름이 덮이고 비가 내린다(雲行雨施)”는 구절은 『장자』「천도」에 “해와 달이 비추고 네 계절이 운행되는 것이 마치 밤낮의 운행에 법칙이 있고 구름이 덮이고 비가 내리는 것과 같다”고 나온다.”고 하고 있다. 『주역』에 대한 대표적인 근대적 해석은 서정주의 구상을 검토할 때 참조점을 제공한다.


“「雲行雨施」라는 말이 주역엔가 어덴가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은 내가 부활을 쓸 무렵에 얻어드른 문자는 아니지만, 요즘 나는 이 말이 보통으로 생각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죽어서 썩어서 蒸發해서 날라가면 구름이 될 것 아니겠습니까. 혼은 유물론자들의 말과같이 없는 것인지 있는 것인지 모르지만, 그 구름은 많이 모이면 비가 되어서 이땅위에 내릴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려 운행우시........”


위의 인용은 두 가지 점에서 의미가 있다. 첫째 운행우시라는 『주역』의 사유방식이 1946년 현재 서정주 시에서 중요했다는 것이다. 둘째 서정주가 『주역』의 상상력에 굳이 ‘유물론자’를 그 외연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정주의 운행우시의 상상력은 동양 사상에 대한 해방기의 ‘사회주의적 절충론’으로부터 활력을 얻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운행우시’에 대한 서정주의 시론적 사유는 『화사집』에 수록된 「부활」을 해방기로 불러내 왔으며, 마침내 새로운 시세계를 창안하는 데도 성공한다. 다시 말해서 해방기 서정주의 시론적 사유는 『화사집』 시기의 「부활」에 투사되고 있으며 동시에 새로운 시세계를 창안해내는데 그것이 바로 「춘향유문」[서정주, 「춘향 유문-이몽룡에게」, 『민성』, 1948.5.]이다.

해방기 서정주의 시적 전회는 『주역』을 매개로 『화사집』의 세계를 춘향의 세계로 바꿔내는 실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서정주의 「춘향유문」은 ‘운행우시’ 즉 자연의 영원한 순환이라는 도가적 사유에 대한 근대적 해석을 춘향이의 ‘직정언어’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안녕히 계세요

도령님.


지난 오월 단옷날 처음 맛나든날

우리 둘이서 그늘밑에 서 있든

그 무성하고 푸르른 나무 같이

늘 안녕히 안녕히 계세요.


저승이 어딘지는 똑똑히 모르지만

춘향의 사랑보단 오히려 더 먼

딴 나라는 아마 아닐것입니다.


천길 땅밑을 검은 물로 흐르거나

도솔천의 하눌을 구름으로 나른

다해도 그건 결국 도령님 곁 아

니예요?


더구나 그구름이 쏘내기되야 퍼부

을때 춘향은 틀림없이 거기 있을

거예요!


註. 도솔천, 兜率天. 삼십삼천중의 하나


                    「춘향유문-이몽룡에게」


한편 서정주는 「부활」에 대해서 이렇게 진술했다. “그 어려운 주소라는 것은 두말할것도 없이 저승 내지 하눌나라의 표현입니다. 지금의 내심정으로선 이런 표현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봅니다만, 이것은 후일 내가 늙어서 전집이나 가지게 될 때까지는 정당하게 고처지겠지요.” 이러한 진술로 볼 때 서정주는 이 ‘어려운 주소’라는 관념어를 「춘향유문」의 ‘도솔천’이라는 구체적 이름으로 형상화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도솔천은 불교의 세계관에서 삼계이십팔천 중의 하나인 욕계육천 중의 제사천이다. 그런데 서정주는 「춘향 유문-이몽룡에게」에서 “삼십삼천중의 하나”라고 쓰고 있다. 도솔천은 미륵이 머무는 곳으로 간주되며, (도교와 관련을 맺는) 무속의 축원문에서 ‘삼십삼천 도솔천’으로 읊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점은 판소리 심청가에서도 일부 확인된다. 배연형, 『춘향가 심청가 소리책』,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8, 325쪽 참조.

 단순한 착오인지 의도적인 기술인지 알 수 없지만 이 점은 「춘향 유문-이몽룡에게」의 컨텍스트를 불교 바깥으로 열어놓는다. 50년대 이후 서정주는 「춘향 유문」(『서정주시선』)에서 춘향을 ‘욕계육천 중 제사천’으로, 「선덕여왕의 말씀」(『신라초』)에서 선덕여왕을 ‘삼십삼천=욕계 제이천’으로 안착시킴으로써 좀 더 불교적 세계에 밀착하게 된다.

따라서 ‘영혼’과 ‘불교적 윤회’라는 다소 피상적인 용어로 「춘향 유문」에 접근하는 연구 관행은 수정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춘향과 이도령은 비록 몸은 이승과 저승으로 나뉘더라도 영혼은 항상 같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 이 시의 상상력이 불교의 윤회사상에 닿아 있음은 쉽게 추출될 수 있는 사실인데, 국화옆에서나 춘향유문의 이 같은 불교적 경도는 그의 시세계가 이 시기로부터 불교로 본격적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박호영, 『서정주』, 건국대학교출판부, 2003, 69쪽.

는 진술에서 보듯이 소위 ‘동양’적이라고 분류되는 서정주의 시 텍스트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소박한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서정주의 ‘동양적 시’의 창작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와 동양 사상을 단순 대비하는 단계는 넘어설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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