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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백수 김한량 Sep 08. 2023

미안하다. 얕봤다.

D+1 포르투갈길 1일 차

✔️루트 : Lisbon - Alverca do Ribatejo (약 30km)

✔️소요시간 : 7시간 44분







시작은 상큼했다. 7시쯤 눈을 떠 설레는 마음으로 배낭을 싸고 조식을 먹으러 내려갔다. 호스텔 정원에서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오늘 루트를 체크했다. 어제 하루 리스본 관광을 하며 30 km가 넘는 거리를 걸었기에 오늘 여정에 자신감이 넘쳤다. 호스텔에서 같은 방을 쓴 친구의 응원을 받으며 기분 좋게 길에 나섰다.



호스텔에서 출발 전 먹은 아침과 점심에 먹으려고 챙긴 도시락



호스텔에서 떠나기 전, 설렘 가득!



리스본 시내를 떠나기도 전에 설렘은 금세 걱정으로 바뀌었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10kg의 배낭의 무게가 발바닥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배낭을 잘못 멘 것은 아닌가 싶어 몇 번이고 멈춰서 배낭끈을 조였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발바닥은 금세 땀으로 가득 찼다. 미키마우스처럼 발이 커진 기분이 들었다.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오늘이 끝나기도 전에 내일이 무서워졌다.


점심을 먹기 위해 풍경이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앉자마자 땀으로 축축한 양말 벗어던졌다. 살면서 이렇게 발에 땀이 나본적이 있던가?(지금까지 나는 태생적으로 발에 땀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 등에 난 열기로 보온 보관된 도시락을 꺼냈다. 힘이 들어서 그런지 입맛은 없었지만 에너지를 얻어야 했기에 억지로 씹어 삼켰다.



그랬다. 시작은 상큼했다.




그리고 불과 몇 시간 후 상거지가 되어 버렸다.



포르투갈길은 산티아고순례길 루트 중에서 상대적으로 걷는 사람이 적은 편이라고 들었다. 그리고 포르투갈길을 걷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르투에서 산티아고까지의 짧은 루트를 선택한다. 나는 이왕이면 전체 루트를 다 걷고 싶었고, 포르투갈은 처음이었기에 관광 겸 리스본부터 걷기를 선택했다. 순례자가 많이 없어서 걱정했지만 지도가 없어도 다닐 수 있을 만큼 표식이 꽤나 잘 표시가 되어있었다. 예상대로 다른 순례자들은 만날 수 없었지만 표식 덕분에 외롭지 않았다.


화살표는 파란색과 노란색 두 개였다. 그 위에는 'Fátima'라고 쓰여 있었는데 처음엔 다음 동네 이름인 줄 알았다. 아무리 걸어도 같은 이름의 마을이 안 나와서 의아했다. 며칠 뒤에야 파란 화살표가 성모가 발현되었다는 Fátima라는 마을로 가는 또 다른 순례길 표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산티아고를 향해 있는 화살표들. 노란색 화살표는 산티아고로, 파란색 화살표는 Fátima로 안내한다.




계속 걷는다. 자연 속을 걷다 보면 여기가 포르투갈인지 양수리인지 잘 구분이 안 간다.



걸으며 가방 안에 있는 물건들을 스캔했다. 왜 10킬로가 되어야 했는가... 나의 불안을 잠식시켜 주길 바라며 챙겨 온 철학 서적,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것에 대한 불안 때문에 챙겨 온 촬영 장비. 나를 괴롭히는 것들은 전부 나였구나. 가만히 존재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나의 욕심들이 나의 발바닥을 짓누르고 있었구나 싶었다. 하지만 아직 난 이것들을 버릴 수 없을 것 같다.


또 떠나기 전 병원투어를 통해 부랴부랴 챙겨 온 두 달치 약들이 생각났다. 하루라도 안 먹으면 스치는 천에도 부어오르는 피부를 위한 약, 시끄러운 마음을 잠재우기 위한 약, 몇 년째 계속되는 설사를 위한 약, 그리고 평생 달고 산 비염을 위한 약.


이 약봉지들이 나를 순례길로 이끌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매일 챙겨 먹어야 하는 약봉지가 점점 늘어났을 때 처음으로 일상에 대한 위기감을 느꼈다. 의사들은 하나의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타고 난 기질이다.’, ‘스트레스 때문이다.’. 억울했다. 나는 별로 받는 스트레스가 없는 것 같은데 다들 자꾸 나라고 한다. 하지만 소화불량으로 찾은 내과에서 신경안정제를 처방받은 후 연계되어 호전되는 증상들을 보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20km까지는 사진 찍을 때 미소를 유지했다. 이후에는 입꼬리를 올릴 힘도 없었다.




저 집 나 주면 잘 살 수 있는데...아까워라...




귀염 뽀짝한 양 무리




후잉 못 지나가겠어...


걷는 중 지나치는 풍경은 한국 시골 풍경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포르투갈어로 된 표지판을 빼고는 사람 사는 모양은 비슷했다. 사람 없는 시골길에는 집집마다 풀어놓고 키우는 큰 개들 정말 많았는데 하도 매섭게 짖어대서 무서웠다. 혹시 나를 쫓아오면 같이 짖어야 하는지, 도망을 가야 하는지, 자는 척을 해야 하는지 헷갈렸다. 일단 안 들리는 척을 하면서 지나갔는데 다행히 더 다가오지는 않았다. 오늘 자기 전엔 꼭 강형욱 선생님의 영상을 보고 자야겠다 다짐하며 앞만 보며 걸어 나갔다.




첫 알베르게와 저녁.


알베르게는 도미토리로 운영된다고 들었는데 도착한 곳은 1인실이었다. 함께 묵게 될 사람들에게 인사할 기운이 없었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방을 내려놓고 나니 움직일 힘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오늘 제대로 먹은 것이 없어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길 건너 식당을 갔다. 식당은 마을 사람들로 가득 차 시끌벅적했다. 포르투갈어로 되어 있는 메뉴판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기에 식당에서 가장 잘 나가는 메뉴로 부탁했다.


스테이크 위에 계란 프라이라니, 자장면 위의 계란프라이도 아직 익숙하지 않은 터라 신선했다. 감자튀김과 밥의 탄수화물 폭탄 콤비네이션에도 꽤나 문화 충격을 받았다. 스테이크 한 점을 잘라 입에 넣었다. 깜짝 놀랐다. 음식이 목에 걸려 내려가지 않는 것이다. 가시에 목에 걸렸을 때처럼 더 많은 음식을 씹어 삼켜 보았지만 도움이 되질 않았다. 몸이 정말 많이 힘들었나 보다. 그래도 내일 걸을 에너지를 비축하기 위해 알약을 삼키듯 물과 함께 억지로 삼켜 내렸다.


 다시 숙소에 돌아와 바로 침대에 쓰러졌다. 몸을 뒤척일 힘도 없었다. 남은 에너지를 모두 손가락 끝에 집중하여 일기를 써내려 갔다. 그대로 쓰러져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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