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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백수 김한량 Sep 09. 2023

순례자를 위한 친절한 마음들, Obrigada

D+2 포르투갈길 2일 차

✔️루트 : Alverca - Azambuja (약 36km. 길 헤맨 거리 포함)

✔️걸은 시간 : 10시간 13분








Obriada(오브리가다) : 포르투갈어로 '고맙습니다'  



이틀 째를 준비하는 태도는 비장했다.




나오자마자 길 잃...



내가 산티아고순례길을 걷기로 결정한 것이 출국 한 달 전이라는 것이 증명하듯이 나는 계획형 인간은 아니다. 떠나기 전 배낭에 무엇을 담을 건지에만 몰두해 내가 만날 길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고 크리덴셜(순례자 여권)을 받는 것도 어디에서 받는지를 몰라 리스본을 한참 헤맸었다. 그렇기에 오늘 알베르게를 나오자마자 100m도 못 가서 길을 잃은 것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길이 사방으로 나 있는 회전 교차로에서 노란색 화살표를 찾아 제자리를 뱅글뱅글 돌고 있자 한 할아버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까미노 길 찾니?"

(포르투갈어를 하나도 못하기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왠지 이렇게 말하신 것 같았다.)

"까미노 데 산티아고!"

(네! 저는 순례길을 찾고 있어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게 최대 아웃풋이었다.)


할아버지는 자신을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시고는 앞장서 걸어 나가셨다. 혹시나 내 발음 때문에 비슷한 이름의 근처 식당으로 가시는 건 아닌지 하는 노파심에 발음을 바꿔가며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연신 외치며 할아버지를 따라갔다. 나 혼자라면 반나절이 걸려서야 찾았을 법한 곳에 표식이 하나 보였다. 할아버지는 표식을 가리키시고는 이후에 어느 방향으로 걸어가야 하는지까지 설명해 주셨다. 대충 느낌으로 알아듣고는 땡큐를 연신 외쳤다. 고맙다는 말 정도는 포르투갈어로 공부해 올 걸 아쉬웠다.


일단 표식이 있는 곳을 알았으니 마을을 떠나기 전 커피 한잔을 마시고 떠나고 싶어 다시 마을로 들어왔다. 카페를 찾느라 마을을 헤매던 중 그 할아버지와 또 마주치게 되었다. 할아버지 보시기에는 내가 눈을 뗀 지 5분도 안 돼서 또다시 길을 헤매고 있는 지독한 길치로 보였을 것이다. 나는 그 정도 길치는 아니라고 변명을 하듯 할아버지가 다가오시자마자 재빨리 에스프레소 잔을 들고 마시는 시늉을 하며 카페를 찾고 있다고 설명했다.



할아버지의 팔 동작을 토대로 대충 카페의 위치를 파악하고 걸어가는데 할아버지는 내가 또 길을 잃을까 걱정이 되셨는지 길 건너편에서 나를 계속 체크하며 함께 걸어주셨다. 발걸음이 빠른 내가 먼저 카페에 도착하고 한참 뒤 할아버지도 카페에 도착하셨다. 할아버지는 카페를 둘러보며 나를 찾더니 잘 도착한 것을 확인하고는 안심하셨다. 나에게 응원의 말을 남긴 후 (이것도 내 마음의 해석) 그제야 당신 갈 길을 가셨다. 아침부터 정말 따듯했다.



내가 행여 길을 잃을까 내 발걸음 속도에 맞춰 걸으시는 할아버지...쏘스윗...




할아버지를 만난 후 걸으며 급하게 포르투갈어 공부를 했다. (출처 - Youtube Channel 'Cafe com Juli')




까미노~오?




마을 하나를 빠져나온 후 조금 당황을 했다. 순례자 표식은 내가 차에 치이든 말든 알바가 아니라는 듯 갓길도 없는 차도로 안내했고 역사와 육교도 건너가야 했다. 표식을 제대로 읽은 것이 맞는지 의심이 돼 길 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까미노?(이 길이 순례길인가요?) 까미노~오?(진짜 맞아요?)'라고 물으며 계속 길을 확인했다.


도보가 없는 차도를 한참 걸어야 했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지나가는 운전자들은 하나 같이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어 주었고 혹여나 내가 다른 곳을 보고 있을 때면 경적을 울리면서까지 응원을 해주었다. 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정말 따듯했는데 혼자 셀카를 찍고 있으면 사람들이 다가와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고 작별인사를 할 때는 'Bom Caminho(좋은 길 되세요)'라는 응원의 말도 빠트리지 않았다. 덕분에 계속 미소를 유지하며 걸어 나갈 수 있었다.


예쁜 해변가를 걸을 때쯤엔 한 커플이 말을 걸어왔다. 내 부모님 나이대의 폴란드 커플이었는데 이들도 리스본에서 출발해 산티아고로 가는 중이라고 했다. 처음 만나는 순례자에 너무 반가워서 한참 대화를 나눴다. 우리의 만남을 기념하기 위해 서로의 지도에 서로의 이름을 적었다. 산티아고에서 만나자는 기약 없는 약속으로 작별인사를 했다.




처음 만난 순례자 Bert와 Anja




주민 분들이 찍어주신 사진 ㅎㅎ




길 위에서 만난 인연들 덕분에 혼자 걷는 길이 외롭지 않았다.




점심. 식전 빵, 메인메뉴, 후식 음료까지 합쳐서 9유로로 정말 저렴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차도를 1시간 정도를 헤맨 후에야 내가 있는 곳이 고속도로이고 길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많이 걸어왔기에 '이어지는 길이 있겠지'라며 계속 앞으로만 걷고 있는데 한 자동차가 갓길에 차를 세웠다. 80대 할아버지 운전자 포함 5명의 가족이었는데 그들은 내가 가는 방향에는 길이 없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곤 내가 돌아가기 위해선 어느 방향으로 가는 게 좋을지에 대한 가족들의 열띤 토론 후 나에게 갈 길을 제시해 주었다. (이 모든 대화는 포르투갈어로 이루어졌는데 역시 바디랭귀지와 마음으로 이해함)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을 텐데 시간을 내어 안내를 해주는 이런 따듯한 마음들 덕분에 다시 제 길을 찾을 수 있었다.


길을 헤매면서 생각보다 더 많은 거리를 걷게 되었다. 누적 30km가 넘어가자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나의 체력도 함께 떨어졌다. 새들도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는지 나무에 모여든 새들이 시끄럽게 울어댔다.



힘이 없어 휘청휘청...



너네들은 좋겠다... 숙소에 도착해서...



드디어 도착한 Azambuja



해가 완전히 지고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것 같다 느낄 때쯤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근데 웬걸. 걸으며 마주친 순례자가 없어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방이 꽉 차 있었고 프런트는 이미 19시에 마감해 담당자가 퇴근한 상태였다. (알베르게는 순례자 전용 숙소이다.) 이미 체크인을 한 순례자들은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어하는 나를 안쓰럽게 보면서 도움을 줄 수 없는 것을 미안해했다.



이대로 길바닥에서 밤을 보내야 하는 건가...



급하게 순례자 어플에 나와있는 근처 숙소에도 모두 찾아갔지만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대답이 없었다. 유심카드를 살 때 전화를 포기하고 무제한 인터넷을 선택한 것이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멘붕이 올 때쯤 다시 정신을 다잡고 아직 영업 중인 카페에 가서 종업원에게 전화를 빌릴 수 있는지 물어봤다. 종업원은 포르투갈어도 하나도 못 하는, 얼굴은 반쯤 녹아내린 순례자가 갑자기 전화를 빌려달라고 하니 심히 당황한 듯 보였다. 나는 영어와 바디랭귀지로 열심히 ’나는 오늘 묵을 곳이 필요해. 근데 숙소가 다 닫았어!!!‘라고 설명했다. 나의 호들갑에 카페에 있던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그들은 내가 말한 호텔에 전화를 해주었지만 이제 더 이상 영업을 안 하는 답변을 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머리를 모아 내가 묵을 만한 곳이 있을지 논의해 주었고 여러 전화 끝에 한 호텔과 연락이 닿을 수 있었다. 40유로의 비싼 호텔이었지만 고민할 여지가 없었다. 오늘 밤 따듯한 물에 샤워를 하고 깨끗한 침대 위에서 잘 수 있음에 감사할 뿐이었다.



서 있을 기운이 없어 샤워실에 주저앉아 한참을 다리를 마사지했다. 다리는 빨간 반점과 함께 한껏 부어 있었다. 내일은 욕심부리지 말고 조금만 걸어야지. 내일 이 무게의 가방을 메고 걸을 자신이 없다. 버려야 한다. 무거운 종이는 다 버리자. 서적과 순례길 지도는 펼쳐 볼 힘도 없다. 헤어에센스라니, 얼마나 사치스러운 물건인가. 필요 없어 보이지만 아직은 버릴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일단 하나씩 정리해야지.




호텔에 도착한 후 발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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