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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백수 김한량 Sep 16. 2023

고행의 길 : 고생 끝에 고기 있다

D+8 포르투갈길 8일 차

✔️루트 : Calvinos - Alvaiázere (약 22km)

✔️걸은 시간 : 5시간 50분







어제 도시락으로 점심을 간단히 먹었기 때문에 저녁은 식당에서 먹으려 했었다. 하지만 Calvinos라는 작은 마을에는 식당이 없었고 배낭에 있던 빵 두 조각 중 하나로 대충 때우고 잠에 들었다.


잠을 잘 잤음에도 아침에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걷기가 너무 귀찮았다. 커피를 마시고, 일기를 쓰고, 동네 산책까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며 걷기를 미뤘다. 멍하니 알베르게 정원에 드러누워 있는데 오늘의 걷기를 마무리한 순례자들이 하나둘씩 도착하기 시작했다. '아... 나도 얼른 출발해야지...' 정오쯤이 되어서 길에 나섰다.  


요즘은 어디로 가야겠다는 목적지 없이 일단 걷기를 시작한다. 몸의 컨디션을 확인하며 걸으며 머무를 곳을 정하고 알베르게를 찾아본다. 인터넷만 가능한 유심을 쓰고 있어서 미리 예약은 하지 않고 무작정 찾아가는데 보통은 침대가 있다.


오늘은 4km 정도 걸은 시점에서부터 힘이 빠졌다. 다음 마을까지 16km 정도를 더 걷느니 4km를 돌아가는 게 나으려나 싶었지만 식당이 없는 마을로 돌아가는 것이 해결책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가는 길에 식당에서 뭐라도 먹으면 괜찮아지겠지 생각했다. 가는 길에 카페 하나는 나올 줄 알았다. 그렇게 나의 고행 길이 시작 되었다.  


아름다운 '숲' 길을 지나갔다. 마녀가 독이 든 사과를 들고 숲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는 이상 숲에 내가 먹을 만한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너무 배가 고팠다. 점점 정신도 희미해져 가는 것 같았다.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비상시를 위해 남겨둔 마지막 빵 한 조각을 먹었다. 며칠 전 식당에서 먹다 남은 빵이었는데 퍽퍽해서 질긴 고기를 씹는 느낌이었다. 허기와 뜨거운 태양, 무거운 배낭까지 짊어지고 걸으니 왠지 예수의 고행의 길을 간접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마지막 남은 식량
경건한 식사시간



드디어 마을이다. 하지만 식당은 없다. 저 가정 집 냉장고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문명이 식량을 제공해주지 않으니 내 눈은 자연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길가에 예쁘게 핀 라벤더도 먹음직스럽게만 보였다. 마을 근처에 다다르니 과일나무들이 많이 보였다. 허기가 극에 달했던 터라 남의 집 정원 안에 있는 과일나무라도 기어 올라갈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다행히 갓길에도 과일나무가 많이 있었다. 하지만 과일은 금방 배에서 꺼졌고 허기는 계속되었다. 목적지까지 갈 힘은 없는데 가장 가까운 식당이 목적지에 있었다. 허기를 채우며 걷다 보니 나무에서 딴 오렌지만 6개는 먹은 것 같다.



처음 보는 과일. 슈퍼에서 파는 것을 본 적이 있어서 따 먹었다.
포르투갈은 과일 천국이다


드디어 도착했다!! 문명에!!



보통은 마을에 도착하면 바로 숙소를 잡고 밥을 먹지만 오늘은 잘 곳이 없어도 일단 먹어야 했다. 일전에 알베르게에서 만났던 독일 친구가 이미 도착해 있었고 타이밍이 맞아 다른 순례자들과 함께 밥을 먹기로 했다. 나의 고생을 보상을 하듯 메뉴는 완벽했다. 순례자들을 위한 메뉴였는데 15유로에 수프와 돼지고기, 샐러드, 감자, 푸딩, 커피까지 포함이 되었다. 모든 음식이 너무 맛있었다.


내가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보자 친구들이 자신들 접시에 있던 음식을 내 접시에 덜어 주었다. 덕분에 남은 음식은 다 내 몫이 되었다. 배낭에 비상식량이 비었던 터라 모두 도시락 통에 담았다. 내가 남은 고기를 정성스럽게 썰어 도시락통에 담는 것을 본 친구들은 나를 신기하듯이 바라봤다. 나는 식당을 찾기 힘든 순례길에서 남은 음식에 미련을 갖지 않는 그들이 더 신기했다. 음식을 충분히 다 즐기고 나니 어느새 저녁 10시가 넘어있었다.




알베르게에도 무사히 들어올 수 있었다. 나의 도착이 나보다는 알베르게 주인에게 더 반가운 일처럼 보였다. 그는 어디에 엄청난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숨겨 놓은 듯한 얼굴로 나를 맞았는데 조금 무섭기도 하면서 설레기도 했다.


"네가 방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절차가 있어"


주인은 작은 술잔 두 개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술 한 병을 들더니 고급레스토랑의 소믈리에처럼 술병을 들고 말했다.


"이 술은 교황들이 행사 전에 마신다는 아주 소중한 술이야. 이 술이 목을 타고 내려가는 느낌에 집중해 봐. 하루의 고단함이 내려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거야"

 




주인과 나, 그리고 마침 방에서 나온 다른 순례자가 함께 건배를 한 후 천천히 술의 맛을 음미했다. 달달하니 먹기에 좋은 술이었다. 이어서 주인은 테이블 위에 무언가를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소중한 의식을 치르듯 모든 물건의 위치의 각도까지 신경 썼다. 실링 왁스 스탬프 재료였다.


순례길을 걸을 때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순례자 여권(크리덴셜)이다. 알베르게에서는 이 여권에 자신의 숙소 이름이 담긴 도장을 찍어준다. 나중에 산티아고에 도착해서 완주 인증서를 받을 때 순례자가 요행을 부리지 않고 진짜 걸어서 도착했음을 증명하는 도장이다. 보통은 일반 잉크 도장을 찍어주는데 이곳에서는 특별하게 실링 왁스로 스탬프를 찍어주었다.


해리포터에서나 보던 실링 왁스로 도장을 받을 생각을 하니 신이 났다. 내가 주인의 행동 하나하나에 감탄을 하자 그는 더 어깨에 힘을 주고 스탬프를 찍었다.(나의 감탄사 덕분에 오늘 순례자 중 내가 가장 화려한 스탬프를 받았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비즈 하나까지 정성스럽게 골라주셨다


환영 술, 실링왁스스탬프 이후에도 선물은 끊이지 않았다. 3인실 방을 혼자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배도 부르고, 따듯한 물에 샤워도 하고, 편안한 침대도 있고, 비상식량으로 고기와 빵이 충분히 있고...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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