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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백수 김한량 Sep 22. 2023

불안에 대하여

D+11 포르투갈길 11일 차

✔️루트 : Rabaçal - Coimbra (약 29km)

✔️걸은 시간 : 7시간 40분






잠을 자는 내내 몇 번 깼다. 밤에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깨고, 다른 사람이 화장실 가는 소리에 깨고, 이유 없이 깨다 보니 잠을 제대로 자지 못 했다. 6시쯤 일어났지만 피곤함이 그대로였다. 레몬차를 한잔 마셨지만 가시지 않는 피곤함에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다시 눈을 뜨니 9시였다. 이탈리아 순례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어젯밤 나를 발견하고 유난히 반가워했다. 나처럼 11일째 걷고 있는데 오는 길에 순례자를 만나지 못했다며 함께 걷기를 제안했다. 나도 누군가와 함께 걷는 것은 처음이기에 그러기로 했었다. 조금 더 쉬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기다리는 친구에게 미안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길에 나섰다.



그는 지금은 이탈리아에 살지만 포르투갈에서 대학을 졸업했다고 했다. 그는 포르투갈에 대한 많은 것들을 설명해 주었다. 각 골목에는 이름이 있다는 것, 코임브라가 대학 문화의 중심지라 많은 대학생 파티가 있다는 것, 식당에서 빵을 리필하려면 돈을 내야 한다는 것(지금까지 빵은 공짜인 줄 알았다)을 알게 되었다.  



Rua는 영어에서 'Road'에 해당하는 단어라고 한다. 각 골목에는 그 길의 이름이 있다.



창문 너머로 대화하시던 아주머니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같이 사진 찍기를 부탁했다



걷는 길에 발견한 순례자 쉼터



길가에 아름답게 꾸며진 순례자를 위한 쉼터를 발견했다. 잘 가꿔진 정원 가운데엔 나무로 만들어진 쉘터와 함께 순례자들이 앉아 쉴 수 있는 의자와 따듯한 차, 비스킷이 마련되어 있었다. 포르투갈어를 할 수 있는 이와 걷지 않았으면 단지 누군가의 정원이라 생각하고 그냥 지나쳤을 것 같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있는 이곳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우리가 앉아서 쉬고 있을 때 한 남성이 트레일러에서 나와 밭 일을 시작했다. 이곳의 주인이었는데 프랑스 사람이라고 했다. 트레일러에 살고 있는 듯했다. 그의 이야기가 궁금했지만 불어를 못 하기에 많은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그가 자신을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리고 정원 가운데에 있던 작은 움막을 보여주었다. 여러 종교 장식물로 꾸며져 있었는데 모든 것이 정말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었다.


우와 이거 만드는데 얼마나 걸렸을까!
여기에서 하루 묵어도 될 정도로 예뻤던 공간



이후에 맞이한 산새와 자연은 정말 아름다웠다. 오늘따라 유난히 예쁜 구름과 햇살 덕분에 더 아름다웠다. 이 풍경이 이탈리아 순례자에게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걷기는 회사원의 점심시간 산책 같았다. 그는 걷는 내내 직장 사람들과 통화를 하고 휴대폰을 체크했다. 그리고 걸으면서 계속 담배를 피웠다. 그도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산 중턱에서 담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급도로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괜찮다고 말은 했지만 가장 가까운 카페(포르투갈은 카페나 바에서 담배도 판다)를 찾기 위해 또 휴대폰만 보았다.





산 하나를 지나고 나오니 로마시대 유적지와 함께 미술관이 있었다. 로마시대 유적지는 처음이라 구경을 하고 싶었지만 친구의 갈 곳 잃은 눈동자를 보니 차마 말도 꺼내지 못했다. 배가 고팠기에 일단 갤러리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가기로 했다. 그는 음식을 기다리는 내내 담배를 가진 사람을 찾기 위해 테이블 하나하나를 체크했다.


'제발 누군가 얘한테 담배 좀 주세요!!'  


그와 어떻게 따로 걷자고 이야기할지 고민하면서 같이 흡연자를 찾았다. 그는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었는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디를 다녀왔나 했더니 웨이터에게 부탁해 담배를 구했고 흡연 후 조금 편해진 표정으로 돌아왔다. 덕분에 식사는 편하게 할 수 있었다. 다행히 식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카페가 있었고 그는 니코틴이 부족했는지 그 자리에서 담 배 두 가치를 더 피웠다. 나는 그가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일 때 이때다 싶어 먼저 가겠다고 말하곤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나의 혼자 걷기는 얼마가지 못 했다. 길가의 오렌지 나무에서 신나게 서리를 하는 중에 한 순례자가 말을 건네왔다. 아일랜드에서 온 순례자라고 했다.


"이거 따도 돼?"

"주인 없는 나무라서 괜찮아."

"주인 없는 거 맞아?"

"땅에 떨어져서 짓무른 오렌지들을 많잖아. 뱃속에서 짓무르는 게 낫지. 너도 좀 챙겨."


우리가 한창 오렌지를 배낭에 담고 있을 때 한 아저씨가 우리를 불러 세웠다. 그는 반가운 듯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오렌지 농장의 주인인 듯했다. 그는 뭐라 말하더니 자신의 농장에서 오렌지를 따기 시작했다. 그리곤 품에 한가득 담은 오렌지를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나와 아일랜드 순례자는 손에 받아 든 오렌지의 양과 무게에 놀라서 서로를 쳐다봤다. 하지만 아저씨의 생각은 달랐나 보다. 역시나 모자랄 것 같다고 생각이 되었는지 몇 개를 더 따서 우리 손에 쥐어주셨다. 서리한 오렌지에 아저씨가 주신 오렌지까지 가방에 넣고 나니 가방이 가득 찼다. 그리고 배낭이 엄청 무거워졌다. 이 가방을 어떻게 메고 가야 할지 벌써 걱정이 되었다. 우리는 배낭 무게를 줄이기 위해 그 자리에서 몇 개는 바로 뱃속에 담았다. 그리곤 아저씨에게 감사의 의미로 엄지를 들어 올리며 '따봉(Tá bom)'을 외쳤다.



왜 이렇게 다들 마음이 좋은 건지~~~!!!!!! 넘 사랑스러운 포르투갈 사람들!!!

 


마침 이 순례자와 목적지가 같아 함께 걷기로 했다. 그는 예산을 아끼기 위해 하루에 최대한 많이 걷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했다. 오늘도 나보다 10km 정도 전 마을에서 출발했다고 했다. 그는 에너지가 넘치고 수다스러운 사람이었다. 지쳤을 법도 한데 걷는 내내 그의 이야기는 멈출 줄 몰랐고 덕분에 걷는 것이 심심치 않았다.


5시쯤이 되자 그는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이전에 한 마을에서 방을 못 구해 고생을 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설마 방이 없겠어? 없으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걷고 있었기에 그냥 흘려 들었다. 그러나 수다스러운 그는 불안을 말하는 것도 멈추질 않았다.


"벌써 6시야. 코임브라까지 얼마나 남았어? 넌 어느 숙소로 갈 거야? 나도 따라가도 돼? 방이 없으면 어쩌지? 닫은 거 같은데?"


나는 그에게 불안하면 나보다 빨리 걷기를 제안했지만 그는 계속 나와 함께 걷기를 선택했다. 나 또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불안해하는 그를 위해 알베르게가 꽉 찼을 경우 갈 수 있는 호텔을 알아보느라 휴대폰만 보면서 걸었다. 그래도 그의 불안 덕분에 오늘 내가 가려고 했던 알베르게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알베르게는 수도원에서 직접 운영하는 곳이었다. 산티아고순례길이 가톨릭 순례자들로 인해 생긴 길이다. 알베르게 또한 가톨릭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수도원, 왕실 기관 등에서 생긴 것이 원조이다. 지금까지는 개인이나 자치구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만 갔었기에 오늘 '찐 알베르게'에서 묵을 생각을 하니 너무 설레었다. 룰이 엄격하다는 이야기도 들어서 늦은 시간에 도착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마을 근처에 다다르자 코임브라 도시 전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순례길에서 만난 모든 이들이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다. 내심 '아름다워 봤자 도시가 거기서 거기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해 질 녘 보이는 도시의 전경에 금방 피곤함을 잊었다. 도시 사진 찍으라, 친구의 불안 받아주느라 다른 호텔 알아보느라, 정신없이 걸었다.


붉은 지붕에 붉은 노을이 뭍어 참 예뻤다.


도착한 산타클라라 수도원!



도착한 산타클라라 수도원은 정말 수세기 전에 세워진 오래된 곳이었다. 역사가 오래된 벽에 그대로 묻어 있었다. 호그와트에 온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요정들이 준비한 음식이 가득한 그레이트홀을 기대하며 두꺼운 철문을 밀어 보았지만 열리지 않았다. 문을 두드려도 둔탁한 소리만 날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낙심하고 나가려는데 관리자를 대문 앞에서 만날 수 있었다. 퇴근하던 길이라고 했다. 운이 정말 좋았다. 그는 숙소 안내 전에 성당 내부를 구경시켜 주었다. 십자가와 각종 조각들의 컬렉션을 지나 성당에 들어갔다.




수도원 성당 내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거대한 미술 작품들과 조각품들이 금장에 뒤덮여 웅장했다. 그 아름다움에 우와를 수십 번을 외친 것 같다. 성당을 본 후 가슴이 너무 뛰어서 벽과 바닥의 돌조각 하나하나에 감탄을 하며 알베르게로 향했다. 오 마이 갓. 영화에서나 보던 좁은 돌계단을 올라가다니, 그리고 오늘 밤 여기에서 묵는다니! 숙소는 나의 기대만큼 적당히 허름하고 적당히 편안해 보이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어제 만난 순례자들의 다시 볼 수 있었는데 수도원에서 만나니 괜히 반지의 제왕의 반지원정대 일원을 만난 것처럼 유난히 더 반가웠다.



저녁 수도원의 전경
코임브라 도시 전경


짐을 풀고 도시구경을 할 겸 저녁을 먹기 위해 밖에 다녀왔다. 잘 준비를 하던 중 한 순례자가 잔뜩 흥분한 상태로 방에 들어왔다. 알베르게 문이 다 닫혀있어서 밖에서 한 시간을 기다렸다고 했다. 그녀는 이웃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했고 여러 사람에게 전화 연결 끝에야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하며 울먹였다. 수많은 알베르게를 다녀봤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라며 최악이라고 했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때도 그녀는 흥분 상태에 있었다. 함께 방을 쓰는 순례자의 코골이 때문에 밤새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했다. (나도 듣긴 했는데 다행히 나는 너무 잘 잤다.) 자신이 코를 고는 사람이면 알베르게가 아니라 호텔룸을 잡아야 하는 게 아니냐며 화를 냈다. 그리곤 휴대폰을 잃어버렸다며 흥분하고, 침낭커버를 못 찾겠다며 또 흥분했다.  


오늘은 걸으며 여러 사람을 불안을 바라보게 되었던 것 같다. 이들의 불안에 영향을 받은 것은 내 안에 그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스럽게 평소의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나도 남들에게 내가 그들을 바라보던 시선을 받은 적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내가 만난 세 명의 불안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불안이 이들이 가진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불안은 시간을 집어삼켰지만 어떤 것을 해결하는 동력이 되지는 못 했는데 마치 불안할 때의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불안 밖에서 아름다운 시간과 풍경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며 나의 불안에 대해서도 조금 더 옆에서, 객관적으로 지켜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불안에 대해 생각을 하다 며칠 전 걷던 중 아빠와 한 통화가 기억이 났다.


"사람 조심해. 특히 유난히 친절한 사람을 특히 조심해. 좋은 사람이 많지만 그중 나쁜 사람이 꼭 있어."

"잘 있는 사람을 왜 불안하게 해"

"불안하라고 하는 소리야!"


화가 났다. 불안하고 싶지 않아서 온 여정에 불안을 심는 말들이었다. 어려서부터 아빠는 항상 걱정 어린 말로 최악에 일어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주의를 주곤 했다. 사랑이었다. 사랑하니까 걱정하는 거다. 그런데 그 걱정들은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너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있어.'

'너의 상황은 더 최악이 될 수가 있어'

'아주 나쁜 사람들이 있어.'


물론 그 말들이 도움이 될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운전을 하거나 할 때는. 편안하게 안주하지 말라는 류의 이야기들이다. 항상 경계하고 걱정하라는 말들이다. 근데 난 그 말들에 화가 난다. 아빠의 사랑을 내가 어떻게 소화시키면 좋을까 잘 모르겠다.


내가 불안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아마 순례길에 오기 전 내과에 가서 신경안정제를 받아온 후 알게 된 것 같다. 불안의 근거는 없다. 그냥 불안하다. 그리고 나는 내 불안을 평가한다. 그리고 불안은 어떠한 신념이 된다.


오늘은 무의식적으로 남의 불안을 평가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평가는 감정을 낳았고 대부분 부정적이었다. 아마 같은 일을 나 자신에게도 했을 것이다. 불안이 없이 사는 방법은 없다. 문제는 불안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 일 것이다. 그 방법은 잘 모르겠고 일단 불안을 평가하는 것을 멈추는 것부터 해보기로 했다.


뭔지 몰라 친구에게 물어보니 티눈이란다. 조그만 녀석이 엄청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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