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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백수 김한량 Sep 23. 2023

10시에 닫는다며

D+12 포르투갈길 12일 차

✔️루트 : Coimbra - Sernadelo (관광 8km 포함, 약 32km)

✔️걸은 시간 : 7시간 45분






Bom dia Coimbra!



지금까지는 캡모자를 쓰고 걸어왔다. 내 얼굴이 큰 건지 코 끝을 중심으로 얼굴 아래만 다 탔다. 차라리 안 썼으면 균일하게 타서 나았을 텐데 곰돌이가 되었다. 큰 도시에 가면 꼭 챙이 넓은 모험가 모자를 사리라 했다. 마침 코임브라에 데카트론 매장이 있었다. 매장 오픈이 10시라 도시 골목들을 구경도 하고 커피도 마셨다.



코임브라의 아침


데카트론 매장은 처음이었는데 없는 게 없었다. 뭔가 신이 나버려서 이것저것 구경했다. 선글라스를 챙겨 왔지만 렌즈가 너무 어두워서 변색렌즈 스포츠 고글이 필요해 보였다.(예뻤다) 바람막이를 챙겨 왔지만 부피가 크고 무거워서 얇고 가벼운 우의로 대신하면 좋겠다 싶었다. (예뻤다)


쇼핑 후 나오니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순례길에 오른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비였다. 매장 앞 벤치에서 아침에 남긴 밥을 마저 먹고 오렌지를 하나 더 까먹었다. 밥을 먹고 나니 역시 우의 바지가 필요하겠다 싶어 다시 매장에 들어가 우의바지까지 구매하고 밖으로 나왔다.




쇼핑 후 기분 쪼아~



쇼핑을 하고 나니 뭔가 기분도 좋고, 이미 정오는 지났고, 비도 오고 해서 베이커리에서 케이크를 하나만 더 먹고 가자 싶어 카페에서 또 시간을 보냈다.


"아 맞다"


순례길에서 만난 러시아 순례자가 나를 위해 코임브라에 맡기고 갔다는 선물을 픽업하는 것을 잊고 있었다. 며칠 전 친구가 코임브라에 있을 때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너 귀마개 있어?"

"아니" 

"아마 앞으로 꼭 필요할 일이 생길 거야. 내가 많이 가져왔으니까 코임브라에 몇 개 놔두고 갈게"


그는 며칠 전 알베르게에서 지독한 코골이 순례자를 만난 후 귀마개의 중요성에 대해 깨달았다고 했다. 그는 나보다 이틀 정도 앞서 걷고 있었기 때문에 며칠 뒤 도착할 날 위해 식당에 귀마개를 맡기고 주소를 보내주었다. 귀마개 픽업을 위해선 왔던 길을 30분이나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너무 스위트한 친구의 마음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Caminho de Earplugs



귀마개를 만난 후 나는 신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그렇게 도시를 돌아다니다 보니 코임브라에서만 8km를 걸었다. 쇼핑을 하고 나니 뭔가 기분도 좋고, 이미 정오는 지났고, 비도 오고 해서 베이커리에서 케이크를 하나만 더 먹고 가자 싶어 카페에서 또 시간을 보냈다.



당 충전



Coimbra에서 하루 더 묵을까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짐 싸서 나온 거 그냥 걷자 싶었다. 



또 충전


30분 걷고 또 괜히 배가 고픈 것 같아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었다. 배가 터질 것 같았지만 계속 음식이 들어갔다. 배가 고픈 건지 걷기 싫은 건지 헷갈렸다.


몸이 피곤했고 조금만 걷고 싶었지만 Coimbra에서 약 22km 거리인 Mealhada에 가야지만 알베르게가 있었다. 몸에 힘은 없고 발가락 바로 아래에 난 티눈이 아파왔다. 걸으며 물집도 생겼다는 걸 감각으로 알 수 있었다. 몸에 리듬을 끌어올리기 위해 음악을 틀었다. 오늘 걷는 길은 도로만 가득했고 사람도 없어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걸으니 도움이 됐다. 하지만 좀처럼 속도는 나지 않았다.



데카트론에서 산 선글라스가 넘 맘에 든다. 멋있는 외계인 같아


오늘 길에서 만난 친구들



해가 진 후 도착한 Sernadelo



총 걸은 거리가 20km 넘어가자 발에 통증이 심해져 똑바로 걷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지는 해에 마음이 급해져 걸음을 멈출 순 없었다. 중간에 아무나 붙잡고 재워달라고 하고 싶었다. 거리엔 붙잡을 사람이 없었다. 마을 도입 전에는 숲길을 지나야 했다. 이미 어둑해진 거리는 숲에 들어서니 더 어두웠고 휴대폰 플래시를 켰다. 살짝 무서운 마음에 더 크게 노래를 부르며 걸었다. 1.7km를 더 가면 알베르게가 있었지만 발이 아파 더 못 걷겠다 싶어 호텔에 들어갔다. 순례자를 환영하는 알베르게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딱딱한 표정을 나를 맞은 직원은 방이 없다고 말하곤 알베르게로 가보라고 했다.



9시가 넘은 시간에 도착했는데 10시까지 운영한다는 알베르게의 불은 꺼져있었다. 순례자들도 모두 잠에 들었는지 불 켜 진 창문도 보이지 않았다. 발도 너무 아프고 대안도 없어 일단 배낭을 내려놓고 앉았다. 아 왜 전화가 안 되는 심카드를 샀을까. 자책하며 앉아있는데 숙소를 지나가던 한 사람이 보였고 급하게 불러 세웠다. 그는 나의 이야기를 듣더니 나를 대신해 주인에게 연락을 해주었다. 


남은 침대가 없다고 했다. 몸이 지칠 대로 지쳤기에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발이 너무 아파 그냥 멍하게 앉아만 있었다. 이 친절하신 분은 다른 동네에 있는 호텔들에 다 전화를 해주었다. 네 번의 전화 끝에 한 호텔에 남은 침대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호텔에서 콜택시를 불러주었다. 호텔은 내가 걸어온 길에 있었다. 발을 절뚝거리며 2시간 동안 걸어온 길을 10분 만에 되돌아가니 기분이 이상했다. 역시 호텔은 비싸다. 내 예산에 초과되는 금액이었지만 고민할 여지가 없었다. 오랜만에 잘 정리된 1인실 방에 들어서니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싶었다. 



하... 물집의 통증을 감내하며 두 시간동안 걸어온 길을 차로 되돌아가는 기분이란...



'혹시'는 모두 버리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짐을 과감하게 줄이자. ‘혹시 모르니까’ 가지고 다니던 것들과 작별인사할 때이다. 가방에 있는 모든 물건을 꺼내 놓았다. 그리고 샤워를 했는데 서 있을 힘이 없어 주저앉아 따듯한 물을 틀어놓고 한참을 발을 마사지했다. 빨래를 할 힘도 없었지만 내일 입을 양말과 옷이 필요했기에 조물조물 빨래도 했다.



그냥 짐은 내일 정리하자. 침대에 누워 눈을 감자 발의 통증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한참을 뒤척이다 잠에 들었다.



자기 전 물집 수술 집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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