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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백수 김한량 Sep 24. 2023

'혹시'는 모두 버리기로 했다

D+13 포르투갈길 13일 차 

✔️루트 : Sernadelo - Águeda (약 28km) 

✔️걸은 시간 : 7시간 20분






나의 발걸음을 무겁게 하는 것들을 버리기로 하였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짐 덜어내기에 들어갔다. 가지고 있지만 한 번도 쓰지 않은 것,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것, 꼭 필요한 것들로 나누어서 침대 위에 펼쳐 보았다. 가벼운데 뭐 어때라며 들고 다니던 것들도 있었는데 그 조금의 무게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


얇은 바람막이를 매일 입고 있어서 긴팔티는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상의는 걸는 용 한 벌, 수면 용 한 벌이 남는다. 고어텍스 바람막이를 가져왔는데 워낙 좋은 소재라 고민을 했다. 추울 땐 우의를 입으면 되겠다 싶어 덜어내기로 결정했다. 얼굴을 곰돌이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캡 모자도 다시 쓸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등산스틱은 북쪽길에 산이 많다 들어서 고민했는데 당장의 필요하지 않아 덜어내기로 하였다. 이외에도 혹시 몰라서 가져온 틴트, 자물쇠, 헤어핀 등을 버렸다. 각각의 무게는 크진 않지만 덜어내고 나니 배낭이 훨씬 가벼워졌다. 덕분에 확실히 이전보다 걸음이 가벼웠다.







어제 택시를 타고 돌아온 거리를 추가로 걸을 자신이 없었다. 돌아온 거리만큼 히치하이킹을 해서 가기로 했다. 긴장된 상태에서 엄지를 들어 올렸는데 다행히 바로 차 한 대가 멈춰주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 휴대폰 화면을 보며 주어 가고 싶은 곳을 전달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길이었기에 잘 도착할 수 있었다.




유난히 아름다웠던 하늘
오늘 만난 풍경



배낭은 가벼웠지만 누적된 피로에 발걸음은 느렸다. 눈에 보이는 카페마다 들어가서 커피 한 잔씩 했다. 덕분에 걷는 내내 화장실이 가고 싶어 고생을 했다. 마을을 나오자 숲길과 카페가 없는 마을들만 계속 지나갔다. Alféloas라는 마을을 지날 때쯤에는 식은땀이 다 났다. 이 마을에도 카페가 없었지만 길거리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아저씨들이 보였다. 이들에게 다가가 번역기 화면을 보여줬다. 


‘posso usar o banheiro?(화장실 좀 쓸 수 있을까요?)‘


한 아저씨께서 감사하게 자신의 집 화장실을 쓸 수 있게 해 주었다. 화장실에서 나올 때쯤 다른 아저씨가 커피 한 잔 하고 가겠냐고 했다. 소변을 참는 데에 많은 에너지를 쓴 후여서 조금 쉬었다 가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바로 옆 집에 사는 아저씨의 집 마당에 들어서니 아이 두 명이 자전거를 타고 놀고 있었고 부인께서 미소로 반겨주었다. 순례길에 온 뒤에는 계속 식당이나 카페 아니면 숙소였기에 가정집의 방문에 왠지 모를 안정감이 들었다. 




데코레이션 하나하나에 포르투갈의 냄새가 묻어있어서 참 좋았다




아주머니는 커피와 함께 자신이 직접 만든 케이크와 치즈를 내어 주셨다. 이곳 마을 사람들은 교류가 많은 듯했다. 하나둘씩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낯선 이방인의 방문이 신기했는지 나를 둘러싸고 서서 그들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온 지명으로 추측해 보자면, ‘산티아고 간대, 근데 오늘은 어디에서 잔대? 아게다 간대. 어느 세월에 간대?‘ 식의 대화인 것 같았다.


아이들도 쑥스럽지만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서 있었다. 그리곤 한마디를 내뱉었는데 번역해 보니 '나는 보이스카우트예요' 였다. 귀여워라. 그리곤 자신이 지금은 노란색 스카프를 하고 있는데 내년에는 초록색 스카프를 하게 될 것이라 자랑했다. 우리는 번역기를 통해 서로에 대한 소개와, 아주머니가 내어주신 케이크의 레시피 등 여러 대화를 나누었다.(나중에 알고 보니 이 케이크는 포르투갈에서 부활절 때 먹는 전통음식이라 한다)


아주머니는 케이크를 좀 싸주겠다며 주방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과장 좀 보태서 베개만 한 케이크를 들고 나오셨다. 그리곤 과일도 좀 챙겨가라면서 오렌지도 가득 담아주셨다. 덕분에 오늘 아침 덜어낸 짐들이 무색하게 배낭이 다시 무거워졌다. 그럼에도 이 따듯한 마음을 다 받고 싶어서 덜어내지 않고 다 담아왔다.




넘 사랑스러운 가족!!!


오랜만에 따듯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나니 더 걷기가 귀찮았다. 중간 마을에 갈만한 호텔에 있을까 찾아봤지만 빼박 16km를 더 걸어야 했다. 포르투에서 산티아고 가는 길에는 알베르게가 많다고 들었다. 하지만 현재 걷고 있는 리스본에서 포르투 가는 길에는 20-30km에 하나씩 알베르게가 있어서 컨디션에 따라 선택할 수 없다.


걸을수록 발의 통증이 심해졌다. 티눈이 생긴 곳이 땅에 닿을 때마다 송곳을 밟는 느낌이었다. 통증을 따라 발의 근육들이 느껴졌다. 아, 근육이 이렇게 뒤꿈치로 이어지는구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발의 근육 한 가닥 한 가닥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걸음이 이상해지니 허벅지까지 아파왔다. 






나는 왜 여기까지 와서 걷고 있는가. 

뭘 위해 쉬지 않고 계속 걷고 있는가. 

여기에서 걸으며 뭘 얻을 수 있다 기대한 건가. 


몸이 힘드니까 계속 원론적인 질문이 들었다. 순례길의 역사에 대한 유튜브를 찾아 들으며 내가 사서 이 생고생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의미를 찾고자 했지만 별 도움은 안 됐다. 마음과는 다르게 시간이 지날수록 걷는 속도가 늦어져서 도착예상 시간은 계속 늘어났다. 5km가 이렇게 긴 거리였나? 집에서 한강까지 산책하면 5km 정도 되는데 그 거리와 같은 거리일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걷다 보니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골목을 지나갈 땐 휴대폰 플래시를 켜야 했다. 아니면 차에 치이기 딱 좋은 어둠이었다. 세상은 고요하고. 나는 너무 힘들고. 도움을 요청할 사람도 없고. 좁은 골목에서 차들은 무서운 속도로 쌩쌩 지나가고. 주위에 사람 하나 없는 이 어두운 골목에서 사고라도 생긴다면 어떻게 하는 게 가장 좋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긴급한 상황에 경찰에 신고할 정신은 없을 거야. 아니, 그 이전에 일단 언어가 안 통하니 나에게 생긴 일을 설명할 수 조차 없겠지. 괴한이라도 나타난다면? 배낭이 무거워서 제대로 도망도 못 가겠지? 어두워서 얼굴도 잘 안 보일 거야. 등산스틱은 무기용으로라도 가지고 있었는 게 나았던 걸까.'



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사람들에게 연락이 닿을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을 고민하다가 인스타라이브를 켰다. 블랙박스 역할을 해주길 바랐지만 인스타라이브를 켜니 휴대폰 플래시가 꺼졌다. 그래도 플래시보다 인스타라이브가 안전할 것 같았다.




10시가 넘어 도착한 Águeda, 힘이 없어 흔들흔들 ㅠ 



정말 너무 힘들게 도착한 곳은 알베르게라기보다는 그냥 저렴한 도미토리 호스텔이었다. 침대마다 가방을 넣을 수가 있는 자물쇠 사물함도 있었다. 알베르게가 아니라고 생각하니 신경이 곤두섰다. 순례자들과 한 방에 묵을 때는 물건 분실 걱정을 안 한다. 욕심을 내는 만큼 자신의 가방의 무게가 무거워지기 때문에 순례자들은 자신들에게 꼭 필요한 최소만 가지고 다닌다. 그런데 여기는 일반 여행자도 묵는 곳이라 생각되니 걱정됐다. 중요한 짐을 사물함에 넣고 샤워를 하러 갔다.



오늘도 샤워실에 주저앉아 발을 마사지하고 천천히 몸을 씻었다. 

진짜 나는 왜 사서 이 고생을 하고 있나. 중간점검할 휴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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