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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백수 김한량 Sep 24. 2023

짐승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D+14 포르투갈길 14일 차

✔️루트 : Águeda - Albergaria a Velha(약 18km) 

✔️걸은 시간 : 5시간







조식 맛집이라고 추천받아 온 호스텔이었기에 기대를 많이 했다. 그러나 슈퍼마켓에서 가장 싼 식빵 몇 조각이랑 햄 치즈가 다였다. 기대를 해서 그런지 유난히 맛이 없었는데 그래도 에너지를 채우기 위해 배가 부를 때까지 먹었다. 가방 안에 큰 케이크 하나가 있다는 걸 깨달은 건 이미 배가 터질 때까지 먹은 후였다. 



진짜 맛없었다. 그래도 다 먹었다.



한 순례자가 발을 절뚝거리며 조식을 먹기 위해 들어왔다. 발을 접질려 무릎인대를 다쳤다고 했다. 병원을 다녀왔지만 까미노를 완주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50대쯤 되어 보이는 이 여성은 작가라고 했다. 작년에 포르투갈길을 완주했는데, 이번에는 산티아고에서 리스본으로 가고 있다고 했다. 남들이 도착하는 곳에서 시작하고, 시작하는 곳에서 마무리하는 게 어떤 기분일지 궁금하다고 했다. 흥미로웠다. 산티아고를 향하는 길에서 만나는 이들은 언젠가는 다시 마주친다. 그러나 산티아고에서 출발한 길에선 한번 마주친 이들은 다시 만나지 못한다. 모두가 시작하는 길에서 마무리하는 느낌은 어떨까.


오늘 아침을 먹기 위해 온 사람들은 다들 부상자들이었다. 캐나다 순례자는 발가락이 심하게 부어 있었는데 오늘은 걷지 않고 병원에 들려본다고 했다. 최악의 경우 집에 돌아갈 생각도 하고 있다고 했다. 부상 때문에 걷는 걸 멈춘다면 얼마나 아쉬울까. 부상나지 않게 조심해야겠다. 






오늘은 그래도 꽤 이른 시간에 출발했다. (오전 10시 전 출발이면 이른 편) 아침을 든든히 먹고 나왔지만 금방 또 배고픈 것 같아 Pingo Doce라는 대형마트로 향했다. 나는 지금까지 끼니를 레스토랑에서 해결했는데 많은 순례자들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슈퍼에서 음식을 사서 먹었다. 푸트코트에 음식이 꽤 괜찮다고 했다. 


푸트코트에는 처음 보는 음식이 많이 있었다. 그동안 빵하고 치즈, 고기류를 너무 많이 먹어서 야채가 먹고 싶었다. 야채 무침? 같은 걸 잔뜩 시키고 치킨 닭다리, 수프를 주문했는데 한 접시 가득 담아도 5유로가 안 되는 가격이었다. 맛도 아주 좋아서 앞으로 자주 와야겠다 싶었다. 반은 먹고 반은 나중을 위해 도시락통에 담았다.


큰 슈퍼에 온 김에 뭘 파나 구경을 했는데 순례자가 많은 나라답게 순례자들이 찾을 법한 발관리용 약들이 모여있는 코너가 있었다. 발에 난 물집과 티눈에 도움이 될까 바셀린 하나를, 혹시 가다가 배고플까 봐 견과류 한 봉지를 구매했다. 


밖으로 나오니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판초를 쓰고 그새 또 배고픈 것 같아 견과류를 먹으며 걸었다. 아니 여기 견과류는 설탕물로 재배하나? 정말 달았다. 아몬드는 고소한 맛이라고 생각했는데 먹어 본 적 없는 달콤함이었다.




오늘은 다행히 16km의 거리에 알베르게가 있었기에 마음이 편안했다. 조금 더 빨리 도착해서 쉴 수도 있었겠지만 빗 속에서 조금은 다른 풍경을 기록하며 천천히 걸었다. 오늘은 계속 배가 고팠다. 한 시간에 한 번씩 멈춰서 가방에 든 음식을 하나씩 꺼내 먹었다. 배가 고프다기보다는 며칠 째 계속되는 피곤함에 몸이 위험신호를 느끼고 음식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 건가.



5시간 걸으면서 몇 끼를 먹은 건지




나에게는 고질병이 있다. 과민성 방광염이다. 소변이 자주 마려운데 정작 화장실에 가면 한 두방울만 나왔다. 그런데 일반 세균성 방광염이 아니라 '과민성'이란다. 처음에는 이 말의 뜻을 잘 몰라 여러 대학병원을 다니며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다. 세균검사, 병원에 있는 특수한 변기에서 실행하는 소변의 강도 검사, 소변을 볼 때마다 계량컵에 담아 양과 소변 주기 체크까지 해보았지만 모두 정상이었다. 병원에서도 스트레스라고만 하고 그렇다 할 해결책을 주지 못 했다. 증세는 점점 심해져 오줌이 마렵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소변이 새어 나오는 지경에 이르렀고 매일같이 생리대를 차고 다녀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 병은 우연한 기회에 우연한 곳에서 구원을 받는다. 


당시 나는 우울증이 심해 심리상담을 받던 중이었는데 증세가 심해져 신경안정제와 우울증 약을 처방받았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 약을 먹고 방광염 증세가 호전되었었다. 이후 우울증의 호전과 함께 방광염도 사라졌다. 그런데 순례길에서 다시 방광염 증세가 나타났다. 


며칠 전부터 소변이 자주 마렵기 시작했다. 화장실을 찾기 힘든 순례길이었기에 이 순간들이 더 힘들었다. 오늘은 그 증세가 더 심해졌다.  노상방뇨는 용기가 안 났다. 문명인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도 있었지만 오늘따라 비가 내려서 우의를 껴입고 있어 빠른 처리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문명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려다 성인으로서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순간이 왔다. 알베르게를 100m 남긴 순간 소변이 새어 나왔고 다리를 타고 흘렀다. 비참했다. 그래도 우의바지를 입어 다행이었다. 세상이 함께 젖어있어서 다행이었다. 짜증이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온 상태에서 알베르게 도착했다.  



숲길에 아무도 없지만 문명인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어리석었다.



도착한 알베르게는 넓고 깔끔한 공간이었다. 순례자를 맞는 작은 사무실도 있었다. 내일은 꼭 쉬고 싶었기에 혹시 이틀 밤 묵을 수 있을지 물어봤다. 아프면 이틀 밤을 묵게도 해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발이 아프다고 징징댔는데 카리나라는 관리자는 룰이라 안 된다고 대답했다. 대신 친절하게도 자신만의 발관리 법 팁을 알려주었다. 발에 물집이 있을 때 도움이 된다며 팬티라이너도 몇 개 챙겨주었다.



넓은 방에 혼자 묵게 되어 가지고 있는 옷을 모두 세탁해서 널어 두었다. 나중에야 깨달았다. 아 지금 비오고 있지.



카리나는 내가 편안하게 묵을 수 있도록 정말 많이 신경 써주었다. 알베르게의 꼼꼼하게 설명해 주고, 빨래가 잘 마를 수 있게 히터도 가져다주고, 자신이 직접 만든 차도 챙겨 주고,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치즈도 나눠주었다. 그 친절함의 나의 피곤함도 금세 잦아들었다. 


운이 좋게 나 혼자 넓은 방을 쓸 수 있었다.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라 호텔을 갈까 고민을 했었는데 호텔보다 훨씬 넓은 방에 묵게 되어 좋았다. 가방에 있는 케이크를 잘라 사람들과 나눴다. 나눌 음식이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해서 여유롭게 하루를 마무리하는 느낌이 좋았다. 샤워 후 빨래를 널고, 밀린 일기를 썼다. 이틀 전 일기를 쓰는데도 기억이 잘 안 났다. 사진을 보면서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그리곤 전날 일기를 쓰는데 확실히 감정들이 생생하여 쓰기에 수월했다. 일기를 쓰다 보니 어느 순간 눈이 감겨 있었다. 오늘 다 쓰고 자고 싶었지만 내일 써야 할 것 같다. 내일은 꼭 밀린 일기들을 다 써야지. 이 감정이 남아 있을 때 꼭 다 기록해 두어야지.


밤새 추워 잠에서 계속 깼다. 비가 와서 그런가 보다. 후리스를 입었는데도 너무 추웠다. 다행히 카리나가 주고 간 히터가 있어 침대 바로 옆에 옮긴 후 잠에 들었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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