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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백수 김한량 Sep 24. 2023

미래가 불안하면 경험을 기록하라

D+15 포르투갈길 15일 차

✔️루트 : Albergaria a Velha - Branca (약 10km) 

✔️걸은 시간 : 2시간 20분







Bom Dia! 햇살이 좋아 창가에 자리잡고 아침을 먹었다.



어제 비가 충분히 내렸는지 오늘은 아침 하늘이 맑았다. 큰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너무 따듯해 담요 하나를 빛이 닿는 바닥에 깔고 아침을 먹었다. 여유롭고 포근한 아침이었다. 오늘은 최대한 걷고 싶지 않았다. 검색해 보니 10km 안 되는 거리에 알베르게가 하나 있었다. 멍을 때리며 충분히 쉬고 11시 즈음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걷는 거리가 짧아 마음의 부담이 적은 탓인지 발걸음이 가벼웠다. 요즘 ‘거인의 노트’라는 오디오북을 들으며 걷는다. 무엇을 어떻게 잘 기록한 것인가에 대한 책이다. 순례길에서 매일 느낀 감정과 생각을 적어 내려가기로 했지만 막상 어떤 것을 써야 할지 헷갈려서 듣기 시작한 책이다. 


오늘 들은 내용 중 기억에 남는 문구는 ‘미래가 불안하면 경험을 기록하라’였다. 그리곤 기록을 통해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을 분리하여 내가 진짜 욕망하는 것을 적어보는 것이었다. 사실 이 내용이 새로운 정보는 아니지만 기록이라는 내가 쉽게 할 수 있는 행위를 통해 이야기하니 좋았던 것 같다. 사실 진짜 솔직하게 (주지화나 자기합리화하지 않은) 내 감정을 써 내려가 본 적은 없는 것 같았다. 오늘 샤워 후에 적어 보기로 했다.




오늘의 알베르게 도착!




오늘 도착한 알베르게는 도네이션으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도네이션 알베르게는 따로 책정된 숙박비가 없이 순례자가 원하는 금액을 적은 기부 박스에 넣고 가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것이었다. 알베르게 주인은 산티아고순례길의 여러 루트를 완주한 경험이 있고 그가 받았던 긍정적인 에너지를 일상으로 가져오기 위해 이 알베르게를 열었다고 했다. 알베르게는 정원이 넓은 주택이었는데 가정집 같은(실제로 가정집이기도 하고) 분위기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이곳에선 저녁을 다 같이 먹는다고 했다. 원래는 짐만 내리고 레스토랑을 가려고 했었는데 거창한 저녁을 먹어야 하니 점심은 간단히 때우기로 했다. 주방에 있는 음식을 먹어도 된다고 하여 빵 몇 조각과 파스타를 요리해 먹었다. 파스타에는 올리브오일, 소금, 계란만 넣었는데 놀랍게 맛있었다. 내가 한 음식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아마 양질의 올리브오일 탓일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먹던 올리브오일은 쭌이 아니었다...



밥을 먹고 짐을 풀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미국인 가족들이었다. 다시 만나니 정말 반가웠다. 샤워를 한 후 따듯한 차 한 잔을 타서 예쁜 꽃들이 땅에 다발을 이루고 있는 정원에 앉아 일기 쓰기에 집중했다. 해도 좋고 꽃도 예쁘고 고요한 이 시간이 너무 좋았다. 샤워를 마친 미국인 가족들도 하나둘씩 꽃을 향해 앉았다. 누군가는 노트와 펜을 들고, 누군가는 비디오를 백업받고, 누군가는 블로그에 글을 쓰며 다들 자신만의 방식으로 일기 쓰기에 집중했다. 



일기를 쓰기에 완벽했던 정원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보니 일기 쓰기에 집중이 안 돼서 방에 들어와 조금 더 썼다. 차분히 나의 욕망을 써 내려가 보기로 했다. 내가 순례길에서 이루고 싶어 하는 욕망들로 시작했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욕망, 변화하기 전 나의 상태에 대한 나의 감정, 그것을 이루지 못했을 때 내가 느낄 감정, 반대로 이루었을 때 느낄 감정, 욕망을 위해 내가 하고 있는 일로 나누어서 써내려 갔다. 




이루고 싶은 것 : 살을 빼고 싶다. (뱃살을 납작하게 만들고 싶다)

뱃살 때문에 느끼는 감정 :
축 처진 뱃살은 늙고 매력 없는 여자의 표식이다. 납작하고 탱탱한 배를 가지고 싶다.

뱃살을 빼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
사람들이 나를 낡은 중년의 여성으로 볼 것이다. 더 이상 사용되지 못할 골동품처럼 전락할 것이다. 

뱃살을 빼면 느끼게 될 감정 : 
자신감이 생긴다. 내가 매력적인 여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뱃살 때문에 입을 수 없던 예쁜 옷을 많이 입을 수 있다.

이를 위해 내가 하고 있는 일 : 
고칼로리의 음식을 먹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단 것을 많이 먹지 않으려 한다. 먹을 땐 죄책감을 느끼며 먹는다. 내가 먹는 모든 음식에 대한 칼로리를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안 먹진 않기에 오늘 내가 더 먹을 수 있는 음식에 대해 생각한다. 보통 내 주관적인 계산에 괜찮은 양보다 많이 먹는다. 죄책감을 가진다. 거울을 보며 뱃살을 확인한다. 줄자로 둘레를 잰다. 어제보다 배가 커진 것 같다. 어제보다 허리가 두꺼워진 것 같다 생각한다. 




글로 솔직하게 써 내려간 욕망과 그에 따른 감정들은 나 스스로가 인식하던 나의 모습과는 멀었다. 이것을 이루었을 때, 이루지 않았을 때 느끼는 나의 생각이나 감정은 합리적이지 못 했다. 내 비합리적 사고의 기저가 되는 전사도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했다. 하지만 내 생각에 대한 긍정이나 부정의 판단을 하지는 않기로 했다. 


'이게 나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나쁘거나 좋은 것 없이 그냥 이게 나야.'


쓰다 보니 졸려서 잠시 잠에 들었다. 정말 달콤한 낮잠이었다.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나 보니 어느새 7시가 되어있었고 저녁이 준비되어 있었다. 플레이팅까지 정말 예뻤다. 고기, 감자, 야채 등이 있었는데 오랜만에 보는 야채가 너무 반가웠다. 사람들과 따듯한 음식, 지는 해의 온기까지 완벽했다. 먹을 것이 있을 때 많이 먹어두어야 한다는 강박이 발동하여 또 넘치게 먹었다. 바로 잠들어야 하는데 배가 너무 불러서 큰 일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나온 딸기초콜릿아이스크림은 또 얼마나 맛있었게요?



햇살도, 사람들도, 음식도, 자다 깬 나의 머리 빼곤 모든 것이 완벽했던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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