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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백수 김한량 Sep 24. 2023

빠르고 느린 걸음이 어디있나요

D+16 포르투갈길 16일 차

✔️루트 : Blanca - Airas (약 28km) 

✔️걸은 시간 : 6시간 30분










오늘 걷는 중 뜬금없이 사람들이 다 날 싫어한다는 감정이 확 올라왔다. 순례자들이 나에 대해 수군거리는 상상을 했다. 그들은 내가 너무 잘난 척한다고 욕을 했고, 인종차별을 했고, 내가 더럽다고 했다. 그래서 가까이하기 싫다고 했다. 숨고만 싶었다.








오늘 아침에 한 순례자가 차에 치여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도보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도로에서 몇 번 경험한 두려움이기에 남 일 같지가 않았다. 지금까지 경험한 까미노는 차도를 걸을 때가 많이 있다. 차라리 고속도로는 낫다. 그런데 커브가 있는 작은 골목에서 갑자기 차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면 운전자도 나도 깜짝 놀란다. 오늘도 몇 번 차가 빠른 속도로 내 옆으로 가깝게 지나갔는데 화가 났다. 순례길 표식이 있는 작은 골목에서 이렇게 빠르게 차를 운전하다니.


이야기는 몇 년 전 있던 다른 순례자의 죽음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노년의 부부가 순례길을 함께 걷고 있었다. 남편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대로 집에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아내는 자녀들과 이야기를 나눈 후 포르투갈에서 남편의 시신을 화장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남편의 배낭에서 순례자 표식을 떼어내 자신의 표식 옆에 달았다. 배낭 안에는 남편의 골분을 담았다. 그는 끝까지 남편과 함께 순례길을 완주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듣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가슴이 아프면서도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라 생각했다. 




'순례자 표식'은 순례자들이 가방에 달고 다니는 조개이다. 이 표식으로 일반 배낭여행 중이 아니라 순례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늦게 걷는 편이야"


순례자들과 대화를 나눌 때 내가 항상 하던 말이다. 순례길 첫 주에 만난 이들이 나보다 며칠을 앞서 걷고 있었기에 나도 모르게 그들과 비교해서 이야기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걸으며 늦거나 빠른 걸음이 어디 있나 싶었다. 다들 자신에게 맞는 페이스가 있는 건데 말이다. 사실 이 말은 나의 페이스를 느끼고 나니 진심으로 할 수 있는 것 같다. 


오늘의 걷기는 지난 2주의 걷기와 다른 느낌이었다. 일단 쉬는 방법이 달라졌다. 이전에는 쉬기 위해 잠깐 카페에 들러 잠시 걷는 걸 멈추는 걸로 휴식을 취했는데 지금은 일단 앉으면 신발부터 벗는다. 그리고 다리를 들어 올려 발목을 스트레칭해주고 앉은자리에서 충분히 쉬어준다. (이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무례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다.)


음식을 먹는 것도 나에게 맞는 방법을 찾은 것 같다. 이렇게 걸어본 적이 없으니 체력이 방전되는 것이 두려워 눈에 음식이 있으면 무조건 많이 먹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매끼가 과식이었고 과식을 하면 몸만 무거워질 뿐 배는 금방 또 고팠다. 그런데 오늘은 적당히 먹은 것 같다. 일단 아침을 먹고 출발하여 7-10km마다 잠깐이라도 앉아 배가 고프지 않을 정도로만 음식을 먹어주었다. 약 2시간 간격인데 그렇게 먹고 걸으니 체력이 무난하게 유지가 되었다.


가방도 어느새 내 몸에 맞게 조절이 되어있었다. 가방을 계속 고쳐 메며 걸었었다. 무게가 어쩔 땐 허리에 다 가거나, 고쳐 메면 어깨가 아프거나 했는데 지금은 무게 분배가 딱 맞는 것 같았다. 사실 가방이 몸에 맞춰진 것도 있겠지만 가방의 무게 자체가 익숙해진 것도 있다.







오늘은 여유가 좀 생겨 슈퍼마켓 구경을 했다. 무슨 맛일지 궁금한 것들이 정말 많아 눈이 돌아갔다. 다 먹어보고 싶은데 매일 먹어도 다 못 먹어 볼 것 같아 벌써 아쉬웠다. 이제부터 매일 슈퍼마켓에 들리기로 마음먹었다. 오늘은 요거트랑 치즈를 샀다. 엄청 신선한 치즈가 1유로 대 가격으로 엄청 저렴했다. ㅎㄷㄷ. 요거트 인줄 알았던 건 밥알로 만든 디저트였는데 너무 맛있어서 사랑에 빠졌다. 네 개 짜리라 많다고 생각했는데 맛있어서 몇 시간 만에 다 해치웠다.



슈퍼는 천국이다!!! 내가 왜 이제야 슈퍼에 왔을까




맛도 아주 만족!!!




오늘은 São João da Madeira라는 큰 도시을 지나갔다. 오늘이 무슨 날이지는 모르지만 광장에서 큰 행사가 열렸다.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과 핸드메이드 작품들, 이를 구경하기 위한 사람들도 광장이 가득 차 있었다. 사람들이 직접 만들어온 음식들을 다 맛보고 싶었지만 슈퍼마켓에서 쓴 돈으로 예산 초과였기에 눈으로만 구경을 했다. 









공연까지 구경하다 보니 금방 시간이 지났다. 이 도시를 빠져나오는 중에 표식을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맸다. 순례길에는 표식이 잘 되어 있어서 사람 하나 없는 시골에서도 길을 찾기가 편하다. 그런데 오히려 큰 도시에 들어서면 도시의 화려함에 표식이 잘 보이지 않아 오히려 길을 잃기 쉽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오늘은 무리 없이 6시쯤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걸으며 지금까지 만나지 못했던 순례자들을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나보다 늦게 리스본에서 출발한 사람들이었다. 내가 나의 속도로 걷기 때문에 만난 인연들이었다.




광장에서 한 아주머니가 재미있는 사진을 찍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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