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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백수 김한량 Sep 24. 2023

숨이 멎는 듯한 절경, 포르투

D+17 포르투갈 길 17일 차

✔️루트 : Airas - Porto (약 29km)

✔️걸은 시간 : 7시간 10분







오늘은 드디어 포르투갈길의 중간 지점인 포르투에 도착한다. 포르투를 기대한 것은 아름다운 도시라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이 지점부터 순례자와 알베르게가 많아진다고 들어서이다. 앞으로의 순례길이 어떻게 달라질지 궁금했다.


지난밤 알베르게의 시설은 별로였다. 사실 저렴한 가격 빼고는 알베르게보다는 호스텔에 가까운 분위기였는데 전체적인 분위기도 삭막하고 음습했다. 방 안의 침대와 수건은 모두 축축했는데 환기가 되는 창문이 제대로 없어서 인 것 같았다. 그리고 최악은 순례자를 위한 작은 주방, 아니 그 흔한 커피포트도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커피를 마시는 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루틴이었는데 그것을 못 하니 금단 현상이 오는 듯했다. 


애니메이션 <데스노트> 중



사과를 못 먹어 몸이 베베 꼬인 데스노트의 류크처럼 몸과 마음이 베베 꼬인 상태에서 5km를 걸은 뒤에야 카페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주인은 퉁명한 표정으로 나를 맞았다. 커피 한 잔을 부탁하자 아무 대답 없이 퉁명하게 커피를 만들고 퉁명하게 커피를 전달해 주었다. 카페 안에는 귀퉁이 테이블에서 심각하게 신문을 읽고 있는 아저씨 한 분 밖에 없었다. 카페의 삭막한 분위기에 위축이 되려던 찰나에 주인은 파일 하나와 펜을 꺼내 나에게 건넸다. 


순례자 방문록이었다. 나라 별로 방문자수를 체크하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빵 터졌다. 그는 여전히 퉁명한 표정으로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물었다. 


'꼬레아 도 술(Coreia do Sul)' 


주인아저씨는 작은 나라 이름들을 손으로 훑어가며 나라 이름을 찾았다. 한국인은 내가 첫 번째였다. 아저씨는 2014년부터 기록한 나라별 방문자 기록을 보여주었다. 이 길을 지나간 모든 이들이 직접 체크했을 작은 표식들을 보니 뭔가 큰 가족을 소개받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 소중한 기록 자산이었다. 


 

아저씨의 디폴트 표정이다
기록들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며 웃으시는 아저씨 너무 귀여우심







이제 길거리에서 밥을 먹는게 익숙하다.  



드디어 입성한 도심! 포르투 Gaia 지구



포르투 도심 전경. 아... 정말 너무 정말 진짜 아름다웠다.



포르투의 가이아지구와 히베이라 지구는 도우강을 중심으로 나뉜다. 그 중간은 건축가 에펠이 만든 루이스 1세대 다리가 잇고 있다. 다리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절경에 압도되어 잠시 숨이 멈추었다.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도시의 하나하나를 눈에 담기 바빴다. 이때 처음 기계의 한계를 느꼈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본 풍경의 감동이 카메라에 담기지 않았다. 


포르투에서 숙소로 가는 길 아름다운 도시를 담느라 계속 걸음을 멈췄다. 나는 아무리 아름다운 도시여도 관광객이 많은 곳은 어떻게든 빨리 빠져나가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이 도시에선 관광객의 소음이 자동 뮤트되었다. 숙소에 도착하면 배낭만 내려놓고 빨리 나와 구경을 다니고 싶었다.


루이스 1세 다리에서 바라본 포르투 전경







포르투는 전체적으로 물가도 비싸고 알베르게도 비싸다고 해서 걱정했다. 그런데 마침 며칠 전 만난 미국인 순례자 가족이 이곳에 에어비앤비를 대여했고 남는 침대에서 묵어도 된다고 했다. 완전 운이 좋았다. 이 아름다운 도시에서 그것도 도미토리가 아닌 에어비엔비에서 밤을 보낼 생각 하니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솜사탕에 탄 기분으로 숙소까지 도착했다. 


숙소는 상상이상으로 완벽했다. 오랜만에 푹신해 보이는 매트리스와 이불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행복의 비명을 비명을 지른 것은 다른 지점이었다. 세탁기였다. 순례길에서는 매일 손빨래를 해야 한다. 걷고 지친 몸으로 샤워를 할 때 오늘 입은 옷을 손으로 문지르고 짜고 널어야 한다. 덕분에 자기 전에는 다리와 함께 팔 근육도 피곤한 상태이다. 밤새 다 마르지 않은 빨래는 배낭에 걸어 걷는 동안 햇볕에 말린다. 기대치도 않은 하이테크놀로지에 입을 틀어막았다. 미국인 가족과 함께 문명만세! 기술만세! 를 외쳤다. 내가 가진 모든 옷들을 세탁기에 욱여넣었다. 덕분에 침낭까지 세탁할 수 있었다.



소리 벗고 팬티 질러!!



샤워를 하고 오랜만에 관광모드가 되니 꾸미고 나가고 싶었다. 이 날을 위해 버리지 않고 배낭의 가장 안 쪽에 챙겨둔 메이크업 도구를 꺼냈다. 그러나 뭘 해도 순례자 티를 벗을 순 없었다. 비비크림을 발랐지만 탄 얼굴의 색과 맞지 않아 붕붕 뜨기만 했다. 예쁜 선홍색의 틴트도 까매진 얼굴에 먹혀 티도 안 났다. 머리도 빗고 나름 꾸민다고 꾸몄지만 유일한 여분 옷인 잠옷을 입고 나니 관광객보다는 집 앞 슈퍼에 가는 주민 같은 느낌이었다. 머리를 묶었다 풀었다 지랄발광을 하다가 포기하고 밖으로 나왔다.


사실 관광을 하려고 나왔지만 해야 할 일을 먼저 하기로 했다. 며칠 전 비가 온 날 밤 추웠던 기억이 있기에 경량패딩을 하나 구입하고, 두 켤레 밖에 없는 양말의 분실에 대비해 여분을 사기로 했다. 가장 만만한 데카트론 매장에 가니 사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운동복까지 이런저런 걸 입어보고 나니 10시가 넘었다.





늦은 시간 밖에 나오니 슈퍼는 다 문을 닫았고 배는 고파 그냥 보이는 식당에 들어갔다. 검색해 보니 이삭토스트 고급 버전처럼 생긴 '프란세지냐'라는 포르투갈 전통 음식이 유명하길래 그걸로 시켰다. 식당마다 레시피가 다르다고 들었지만 내가 시킨 것은 스테이크, 햄, 소시지가 들어가 있었는데 엄청 짠 소스 맛이 진해서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프란세지냐



아늑한 방! 넘 행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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