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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백수 김한량 Nov 01. 2023

감당할 수 있는 적당한 무게와 거리

D+24 포르투갈길 24일 차

✔️루트 : Tamel - PontedeLima (약 24km)

✔️걸은 시간 : 6시간






걷기 시작한 지 10분 만에 한 순례자를 만났다. 홀란드에서 온 순례자였는데 인사치레 정도의 대화만 했지만 그의 분위기에 편안함을 느꼈다. 그는 이미 10km를 걸은 상태였고 카페인이 급하게 필요한 상태라고 했다. 순례길에서 조금 벗어난 마을에 있는 카페로 함께 갔다. 


그는 포르투에서 걷기 시작해 오늘이 이틀 째라고 했다. 그는 걷기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물었다. 나는 카페를 찾는 방법, 알베르게 예약 방법 등 내가 아는 정보들을 공유해 주었다. 특히 차를 조심하라고 강조했다. (포르투갈에서 운전자와 눈을 맞추는 것이 그들이 나를 위해 속도를 줄여줄 거란 의미가 아니라는 것도 덧붙였다.)


그는 나처럼 다큐멘터리스트로 일을 하고 있었다. 공감대가 생긴 이후 우리의 대화는 조금 더 솔직해질 수 있었다. 이미 벌린 일이 많은 데도 머릿속에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며 일을 더 확장하는 것에 대해, 그런 자신의 삶과 일을 사랑하면서도 피곤해지는 것에 대해, 카미노 위에서 만나는 풍경과 스토리를 들을 때마다 ‘작품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에 대해 공감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우리가 선택하는 행동 속에 있는 이상한 신념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자아상이 크기 때문에 타인에게 그 모습으로 보이기 위해 현재의 나에게는 부담이 되는 선택을 하는 순간들, 남의 이야기를 궁금해하고 듣는 것에 마음이 열려 있는 반면에 나의 목소리를 듣는 것에는 소홀한 성향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는 서로에게 많은 부분을 공감하며 즐겁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대화를 하다가고 조용히 걸으며 혼자의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다시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나가기를 반복했다. 이 과정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영화 아이디어를 쏟아내고 그는 오프닝 씬까지 만들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들른 식당에서 배낭에 있는 물건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나의 이틀 째 순례길이 그랬듯이 그도 자신의 배낭의 무게에 대해 질문하는 중이었다. 예쁜 크리스탈, 순례길에 올려놓기 위해 집에서 가져온 돌 몇 조각, 핸드크림, 그는 나에게 자신이 이것들을 가지고 온 이유와 꼭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곤 조금이라도 무게를 줄이기 위해 순례길 지도책에서 자신이 이미 지나쳐 오거나, 가지 않을 길의 페이지를 찢어내기 시작했다. 


그가 지도책의 반 이상을 한 장씩 찢어내는 모습을 조용히 관람하며 내 삶에 필요 없는 정보에 대한 생각을 했다. 남들보다 더 많이, 더 발 빠르게 아는 것을 생존방법이라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아니 아마 순례길에 오기 전까지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리고 남들보다 더 많이 알지 않는다는 생각에 자신을 부끄러워했던 적도 있다. 그러나 진짜 나에게 필요한 정보란 무엇일까? 요즘 사람들은 너무 많은 정보에 노출이 된다. 범죄, 정치, 세계, 자연, 우주, 뷰티, 심지어 수많은 인간들의 일상 정보에도 노출이 된다. 아무 생각 없이 정보를 받아들이다 보면 나의 선택들이 필요 이상으로 거대하게 혹은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필터 없이 다 담으려고 노력하다 보면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심한 경우 발이 너무 아파 더 걸을 수 없게 된다. 우울증에 걸렸던 과거의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 더 알려고 하기 전에, 필요 없는 페이지를 걸려내는 작업을 해본 적이 있던가? 자문해 보았다.  




조금 더 걷다 보니 그가 오늘 묵을 마을에 도착했다. 나는 계속 길을 이어나갔다. 그와 헤어진 지 얼마 안 되어서 바로 다른 순례자와 길에서 만났다. 100m를 함께 걸었는데 짧은 대화에서 그와는 함께 걷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지나가는 길에 레스토랑이 있어 화장실에 들렀다 간다고 하고 그를 먼저 보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의 어떤 지점이 나를 불편하게 했을까 좀 더 대화를 나눠볼 걸 그랬나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오늘 길은 특별히 더 예뻤다. 주위에 자연이 가득했고 길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자연의 냄새를 즐길 수 있었다. 나는 이 자연을 조금 더 몸에 담고 싶어 계속 크게 심호흡을 하며 걸었다. ‘Ponte’ de Lima라는 마을의 이름처럼 곧 큰 강이 나왔고 그 주위로 여러 길거리 장이 열려 있었다. 동화 속 마을처럼 아름다운 도시에 압도되어 꿈을 꾸듯 걸어 다녔다. 





그러나 그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해 좋은 곳에 앉아 마을을 구경하던 중 골목 끝 한 아저씨가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꾸 눈이 마주치게 되었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 아저씨는 나에게 조금씩 더 다가왔다. 조금 무섭기 시작했다. 그러나 입술을 삐쭉 거리는 그의 행위를 보자 화가 났다. 아마 동양 여자애가 혼자 앉아 있으니 우스워 보였나 보다. 그냥 무시하고 자리를 옮겼을 수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바로 휴대폰을 들어 동영상을 촬영하기 시작하며 그에게 화난 표정을 보였다. 그는 나에게 가깝게 다가와 자신의 성기를 잡고 주머니에서 돈뭉치를 꺼내었다. 너무 화가 났다. 거리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도 그는 거리낌이 없었다. 그가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해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소리를 질러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사람들이 그를 저지하자 그는 머리 옆에서 손가락을 돌리며 내가 미친 소리를 한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며 떠났다. 나를 도와준 사람이 나중에 또 저런 사람을 만나면 그냥 피하라고 했다. 그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와 만난 후 마을을 더 구경할 기분이 아니어서 바로 알베르게에 돌아왔다. 내 침대는 마을 전경이 보이는 창가 바로 앞에 있었다. 좋은 스팟이라고 생각했는데 밤새 진행되던 음악 페스티벌 때문에 가장 시끄러운 자리가 되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밤에 잠을 잘 잘 수가 없었다. 귀마개를 하고 있었기에 시끄러워서는 아니었는데 커피 때문인가.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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