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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백수 김한량 Nov 18. 2023

순례길 어땠어? 에 대한 대답



순례길 초반에 만났던 친구가 나의 순례길이 어땠는지 짧게 얘기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짧게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몰라 아직까지 답장을 못 했다. 짧게 대답하려면 단지 ‘좋았다. 잘 온 것 같다.’로 밖에 설명이 안 될 것 같아 그동안 느꼈던 점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난 8년 동안 세계 각국을 배회하며 살던 시절이 있다. 그때 다양한 문화권의 친구들과 허물없이 어울리며 매일을 오늘만 생각하며 심플하게 살았었다. 내가 경험한 가장 자유로웠던 시절이다. 하지만 이번 순례길이 진짜 내가 경험한 혹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의 경험이라고 생각을 했다.



순례길 위에선 국적, 성별, 나이, 직업, 능력, 체력 등 모든 평가 기준이 사라진다. 단지 걷는 사람, ‘순례자’만 존재한다. ‘걷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 외에 우리를 나눌 수 있는 기준이 사라진다. 젊은 사람이라고 늙은 사람보다 잘 걷는 것도 아니고, 남보다 빠르게 걷는 게 잘 걷는 걸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일찍 일어나거나 많이 걷는 게 먼저 도착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꼭 다리로 걷지 않아도 말을 타고 걸어도 되고, 휠체어를 타고, 자전거를 타고도 걷는다. 다들 각자가 편안한 방법으로 각자의 길을 걷는다.



순례자들은 하루에 어디에서 잘 건지, 어디에서 먹을 건지, 어디에서 쌀 건지만 고민한다. 인생이 정말 심플해진다. 이 덕분에 삶의 많은 것들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생긴다. 순례길을 걷는다고 해서 새로운 나를 찾거나 깨달음을 얻거나 하진 않는다. 다만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여러 가지 언어를 사용해 펼쳐 놓은 삶에 대한 철학, 인문학들이 나에게 이론으로만 존재했다면 순례길은 그 이론들을 진정으로 경험할 수 있는 장이 되어준 것 같다.



간단한 하루 단위의 삶의 영위를 통해 매일 많은 것들을 증명하고 경험할 수 있었다. 그중 하나는 나보다 훨씬 빠르다고 생각했던 사람들과 길 위에서 만나는 경험이었다. 나는 개인적인 삶 속에서도 내가 느린 것은 아닌지에 대한 불안이 많은데, 다들 각자의 속도가 있는 거야라는 말을 많이 듣고, 사실인 걸 알지만 그렇다고 불안이 사라지진 않았다. 그런데 순례길 위에 나보다 빠르다 생각했던 이와 몇 시간, 혹은 몇 주 뒤 다시 만날 때의 경험은 어떤 멋진 이론보다 큰 배움이었다. 이 경험은 앞으로의 내 삶 속에서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나는 지금도 매일 내가 편안한 걷기 방법을 찾아가고 있는 중에 있는데 이 과정 안에서 나의 개인적 삶 속 걷기 방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 둘이 닮아 있다는 사실도 참 재미있었다.)



순례자들을 만나면 ‘어제는 어디를 걸었어? 그저께는?’이라는 대화가 나올 때가 있다. 근데 많은 순례자들이 이미 걸어온 길은 잘 기억을 못 한다. 나도 앞으로 갈 길이 중요하지 어제 어디를 지나왔는지 굳이 기억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실제로 내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는 내일 내가 지금 어느 길을 걸을지를 결정하는 데에 별 상관이 없다. 시간이 과거를 살지 않는 것처럼 순례길도 그렇다. 이 지점도 과거의 일에 이불킥을 자주 하는 나에게 아주 큰 배움이 된 것 같다.



여러모로 순례길은 재미있는 공간이다. 순례길을 다섯 번째 걷고 있는 한 프랑스 순례자가 순례길을 계속 걷는 이유에 대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가기 때문에’라고 대답한 것처럼 순례길은 삶과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삶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하려고 온 게 아니더라도 순례길에 오른 많은 이들이 삶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원래 사람 사는 거야 다 비슷하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원래 자연에 있고 싶어서 백두대간을 계획했던 터라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에 대한 감상은 별로 없는 나의 순례길 30일 차 감상은 이렇다. 앞으로의 60일은 어떻게 채워질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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