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반백수 김한량 Nov 18. 2023

나는 무통인간이다

D+45 북쪽길 3일 차

✔️루트 : Zarautz - Deba (약 24km)

✔️걸은 시간 : 8시간 15분







코로나에 걸린 후 몸에 이상한 변화들이 생겼다. 일단 이가 시리다. 칫솔이 이에 닿기만 해도 시려서 이를 닦을 수 없다. 후각과 미각이 사라졌다. 미각이 사라지는 게 이런 거구나 처음 느꼈다. 음식들이 다 목을 막히게 하는 모래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단 것과 짠 것은 혀의 감각으로 느껴진다. 딸기를 베어 물었는데 입에서 녹는 게 무슨 공기를 씹는 느낌이었다. 배고픔은 느끼면서도 먹기 시작하면 진안 한 턱 노동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맛있게 먹었던 기억으로 먹었다.


미각뿐만 아니라 몸의 여러 감각이 잘 안 느껴졌다. 오르막길을 오르면 당기던 다리 근육도, 족저근막염인 것 같은 발뒤꿈치의 통증도 사라졌다. 숨이 차면 가슴에 답답한 느낌도 있는데 그것도 없어졌다. 오르막길을 그냥 막 오르게 되었다. 숨은 가빠져도 부수적으로 느껴지는 여러 증상이 없으니 숨이 찬다는 느낌이 안 든다. 무통주사를 맞고 걷는 기분이다. 나는 무통인간이다.



아픈 건 아픈 거고 예쁜 건 예쁜 거니 사진은 찍어야겠고
예쁘긴 또 엄청 예쁜 북쪽길




북쪽길의 지난 2일도 그랬지만 오늘 길은 유난히 더 예뻤다. 포르투갈길에서 만난 스페인의 갈리시아지방도 그만의 색을 가지고 있지만 바스크지방은 그 색이 훨씬 더 뚜렷하게 다가온다. 뜻을 추측할 수도 없는 바스크어 때문일 수도 있지만, 건축물에서도 확실히 독특함이 묻어난다.


Zarautz에서 출발해 Getaria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끝에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오래된 교회가 있었는데 지형에 맞게 지어져서 교회 전체가 기울어져 있었다. 문의 한쪽은 바다로, 한쪽은 마을 골목으로 이어졌다. 너무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바닷가 옆 이 작은 마을이 뭔가 마음에 들었다.


맨날 비가 오니 추워서 긴팔을 하나 살까 하고 교회 앞 옷가게 들어갔는데 티셔츠 하나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점원에게 뭐라고 쓰여있냐고 물어봤더니 여기가 지구를 최초로 일주한 나오 빅토리아호의 선장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의 고향이고, 티셔츠에는 엘카노가 국왕에게 ‘나는 세계의 지도를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한 말이 적혀있다고 했다.


아… 원피스 광팬으로서 이 대사를 들은 후 티셔츠를 안 살 수가 없었다.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엘카노 고향에서 산 티셔츠라니!!! 루피네 고향에 놀러 온 기분이었다.






멍한 상태에서 계속 걸었다. 어느 순간에 누적된 피곤함이 한 번에 확 몰려왔다. 중간에 머물만한 마을이 없어서 Deba까지는 가야 했다. 확인해 보니 아직 3.6km를 더 걸어야 했다. 
알베르게 마감은 8시인데 그 시간 안에 도착을 못 할 것 같았다. 사람들한테 불쌍한 순례자의 얼굴을 보이며 이 마을에 잘 곳이 없을까? 물어보면 재워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나 더 못 걸을 것 같아서 그런데 이 동네에 묵을 곳이 있을까?"

"Deba 개 가까워~30분이면 가"


그 30분을 걸을 힘이 없어서 물어보는 거라는 말은 그냥 삼켰다. 불쌍한 순례자 작전은 포기하고 그냥 걸었다. 뭐 잘 곳 없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경찰서를 가든 문을 두드리든 하면 되겠지 뭐. 그냥 걷자. 


7시 59분. 알베르게 문을 잠그고 나가는 관리인과 딱 마주쳐서 체크인을 할 수 있었다. 북쪽길에서 알베르게에 묵는 건 처음이었는데 길에서는 못 봤던 꽤 많은 순례자들이 있었다. 늦게 도착한 덕분에 이미 사람들로 꽉 찬 방이 아닌 텅 비어있는 방에서 혼자 묵을 수 있게 되었다. 샤워를 한 후 내일 먹을 것을 사기 위해 슈퍼마켓에 갔다. 
참치랑 올리브오일이 반값세일하길래 얼른 집어 들었다. 계산 한 뒤에야 미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빨리 미각이 돌아왔으면 좋겠다... 숙소에 돌아와 간단히 배를 채우고 약을 먹고 바로 누웠다.

   


오늘 묵게 된 알베르게


매거진의 이전글 순례길 어땠어? 에 대한 대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