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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백수 김한량 Nov 18. 2023

화딱지가 나

D+38 북쪽길 1일 차

✔️루트 : Irun - San Sebastián (보트 제외 약 25km)

✔️걸은 시간 : 약 8시간






계획은 이랬다. 아침에 체크아웃을 한 뒤 짐을 호스텔에 맡기고 도시구경을 좀 다니다가 늦은 점심을 먹고 오후 5시쯤 버스터미널로 가서 12시간이 걸리는 이룬 행 버스 안에서 쪽잠을 자고 아침 6시에 도착하자마자 걷자. 지난 순례길에서 얻은 피로감이 채 가시지 않았지만 새로운 여정의 시작에 설레는 마음이 더 컸다.


 걷는 속도에 익숙해져서일까, 이룬 행의 버스 안에서 바라본 창 밖의 풍경이 지나가는 속도가 굉장히 낯설었다. 내 옆을 지나는 모든 풍경이 너무 빨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나에게 가까운 것들은 너무 빨리 지나가 보기에 힘들었다. 반면 멀리 있는 것들은 선명하게 보였다. 내가 걷고 있는 공간의 풍경에만 집중하게 되는 걷기의 속도와 비교가 되면서 버스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잘 때나, 비행기나 버스 같은 밀폐된 공간에 오랜 시간 머물러야 할 때 꼭 마스크를 쓴다. 기관지가 약하기 때문이다. 오늘 버스에서는 더 좋은 비말 차단 마스크를 가져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듣기에도 가래 가득 찬 기침과 재채기를 계속하는 사람들과 12시간 꼼짝없이 갇혔기 때문인데 이들 중 누구도 손으로 입을 가리는 매너 따윈 보이지 않았다.


화딱지가 났다. 코로나 이전부터 감기 기운이 있는데 입을 안 가리고 기침을 하는 사람들을 극혐 했다. 가벼운 기침이든 의도치 않은 재채기에도 나는 잘 감기에 옮았다. 제일 억울한 건 이들은 2-3일 정도 약국 약을 먹고 지나갈 것을 나는 짧게는 2주 길게는 한 달을 꼬박 침대 위에서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감기 걸린 사람의 작은 행동에 굉장히 민감하다. 손을 안 가리고 기침하는 사람들과의 12시간 동행은 나를 정신적으로 괴롭게 했다.


플라시보일까, 버스 안에서 바로 몸살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피곤인지 감기인지 분간이 안 됐지만 일단 가지고 있던 감기약과 진통제를 몸에 때려 박았다. (감기를 질색하는 나의 오랜 노하우인데 조금이라도 감기 비슷한 느낌이 오면 먹을 수 있는 최대치의 약을 미리 때려 박는 수법이다.) 그럼에도 이룬에 도착했을 때 이미 열이 나기 시작했다.





이룬에서 바로 약국으로 향했다. 코로나테스트킷과 목이 아파 목 통증 약을 샀다. 다행히 코로나는 음성으로 나왔다. 버스에서 제대로 잠을 못 자기도 했고 이룬에서 하루 쉬고 갈까 잠시 고민했다. 근데 약을 먹어서인지, 해가 떠서인지 몸이 점점 괜찮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미 6일을 쉬었기 때문에 더 쉬고 싶지 않았다.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걷기로 했다.






걷는 내내 아픈 게 너무 화가 났다. 온몸에 느껴지는 감기의 기운이 너무 싫었다. 지난 몇 년간 심한 감기 없이 지내온 것이 내가 관리를 잘한 탓이 아니라 다들 관리를 잘 해준 탓이라는 것을 오늘 깨달았다. 그래도 이왕 아픈 거 화가 난 것보다 즐겁게 걷는 게 좋으니 다르게 생각해 보려고 노력했다. 오전까지는 몸의 상태는 꽤 괜찮았다. 약 때문인지 열 때문인지 땀 때문인지 조금 몽롱하기는 했다. 구름이 앞뒤로 왔다 갔다 하고 나무들이 이상하게 춤을 추었다. 술에 취한 상태로 걷는다고 생각하니 이 기분도 나쁘진 않았다.




아픈데 또 예쁘다






북쪽길은 시작부터 산을 지나갔다. 첫 7일이 힘들다고 들었는데 컨디션이 안 좋은 상태였는데도 힘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이제 배낭도 내 등짝이 되어버려 무게가 느껴지지도 않는다. 나 자신이 대견했다. 북쪽길은 첫날부터 감동이었다. 북쪽길로 오길 정말 잘했다 생각했다. 


원래는 이룬에서 15km 부근에 있는 알베르게에 가려고 했지만 먼저 도착한 친구가 이미 침대 수보다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 귀띔해 줬다. 알베르게 주인에게 바닥에서라도 자게 해달라고 부탁을 할까 고민하다가 구글지도를 확인하니 다음 알베르게가 6km 지점에 있길래 미리 예약을 하고 더 걷기로 했다. 이 선택은 실수였다. 구글지도는 빠른 길로 알려주니 6km였는데 순례길로 가려면 10km가 넘는 거리였다. 화살표를 따라 산 중턱에 들어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저녁 시간이 다가오자 땀은 비 오듯이 오는데 몸은 추웠다. 그러나 산길 중간에선 버스도, 얻어 탈 차도 없었기에 꼬박 길을 다 걸어내야 했다. 


호스텔에 도착했을 땐 몸살 때문에 온몸에 근육통과 코와 귀는 다 막히고 목에 통증이 심했다. 너무 아파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도 힘들었다. 만취한 사람처럼 정신줄을 겨우 붙잡고 씻은 후 약들을 최대한 몸에 집어넣고 침대에 누웠다.






산세바스티안으로 가는 길 만난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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