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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백수 김한량 Nov 19. 2023

수도원에서의 하룻 밤

D+47 북쪽길 5일 차

✔️루트 : Markina Xemein - Zenarruza (약 9km)

✔️걸은 시간 : 3시간









몸의 감각들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무릎과 발 뒤꿈치의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했다. 콧물도 나기 시작했다. 이제 몸이 제대로 일을 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 대신 무리 없이 오르막길을 오르던 강철다리를 잃었다. 때문인지 길이 완만했음에도 불구하고 걷는 내내 몸에 힘이 없고 어지러웠다. 함께 걷게 된 순례자가 묵는다고 한 성당의 안 뜰에 앉아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배는 찼지만 엉덩이를 들고일어나 걸을 용기가 나지 않아 미사가 진행 중인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비가 와 쌀쌀한 바깥공기와 다르게 따듯한 공기, 아름다운 성가의 음률에 몸과 마음이 가라앉았다. 나도 오늘 여기에서 묵고 가기로 했다. 미사가 끝나자 성당의 직원이 순례자들을 안내했다. 


알베르게는 수도원에서 사제들이 직접 운영하는 곳이었다. 순례자들에게 따듯한 밥과 잘 곳을 제공하였지만 이에 대해 책정된 가격이 없이 기부로 운영이 되었다. 알베르게의 시작이 종교적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을 위해 국가의 교회 단체에서 서비스를 제공한 데에서 시작한 것이니 어찌 보면 나로선 처음으로 전통적 알베르게에 묵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묵어온 알베르게들이 가짜라는 것은 아니지만 책정된 가격 안에 지정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특히 기부에 대한 부담을 전혀 주지 않았다. 이전에도 기부로 운영되는 알베르게에 묵은 경험은 있지만 수준급의 서비스를 제공하려 노력하는 주인의 액션이 오히려 기부에 대한 부담으로 이어졌었다. 그에 반해 이곳에서는 배가 고픈 순례자들을 위해 지난 식사 때 뜯다 남은 빵 조각들을 가져다주었는데 이 작은 선의 속에 순례자들을 감동시키려는 마음이 느껴지지 않아 역설적으로 묘한 감동을 받았다. 



너무 귀여우니까



이곳이 참 맘에 들었다. 머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뜨거운 물도 잘 나왔고 방에 히터도 있었다. 오랜만에 따듯한 물에 샤워하니 묵은 피로가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침대의 두꺼운 담요 안에 들어가 책을 좀 읽다가 잠에 들었다. 정말 행복한 쪽잠을 잤다. 


오후 4시가 되자 휴대폰 알람이 울려 눈을 떴다. 매점이 여는 시간이었다. 오늘은 일요일이었기에 미사가 없는 시간에만 잠깐 매점이 열렸다 닫았다. 마을이 없는 산속에 덩그러니 자리한 곳이었기에 순례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었다. 사제들이 직접 만든 술과 치즈도 판매하고 있었다. 배고픈 순례자들은 간식들을 하나씩 사들고 자연스럽게 식당에 모여 앉았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둘러앉아 치즈와 빵을 나누어 먹었다. 그중 한 순례자가 입을 열기 전까진 아주 즐거운 자리였다. 


벨기에에서 왔다는 순례자가 나에게 어느 나라 사람인지 물어왔다.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하니 자신이 아일랜드 트래킹 여행에서 만난 한국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아일랜드까지 온 그 사람이 영어를 단 한마디를 할 줄 몰랐다는 것을 강조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름 기승전결을 가지고 있던 그의 이야기는 그 한국인이 '젓가락으로 샌드위치를 먹었다'에서 끝이 났다. '샌드위치를 젓가락으로 먹다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인가!'였다. 그는 나에게 동의를 구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아무런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 삼겹살 집에서 쌈을 샌드위치를 먹듯 세 네 입에 배어 나눠 먹는 친구들을 많이 봐왔기에 다른 문화권의 친구들이 자신들에게 익숙한 방법으로 음식을 먹는 데에 별 감흥이 없었다. 


'너도 모든 음식을 다 젓가락으로 먹어?' 


 나는 한국에서 본 유럽 친구들의 이상한 행동을 예를 들며 자신이 편한 방식으로 먹는 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순례길에서 스페인어나 영어를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다른 유럽국가에서 온 순례자들을 너무 많이 봤기에 그 한국 청년이 전혀 놀랍지 않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그랬다. 영어나 스페인어를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상대방이 알아듣든 말든 너무나 당연하게 자신의 나라의 언어로 카페에서 주문하는 순례자들을 많이 봤다.) 벨기에 순례자는 나름 굉장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꺼낸 건데 나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조금 머쓱했나 보다. 그럼에서였을까 그는 기행을 이어나갔다.  


내가 치즈를 자르기 위해 칼을 들자 '이랴오~! 썅~쑝~' 같은 이소룡 소리 같은 걸 내며 '너는 이렇게 잘라먹을 줄 알았어'라고 했다. 나는 농담 섞인 말투로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완전 인종차별적이네'라고 말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주위에 있던 순례자들은 그의 말보다는 나의 말에 뜨끔 했는지 갑자기 나서서 '농담하는 거야, 알지?'라고 했다. 솔직히 그 반응이 더 별로였다. '나도 농담이야'라고 말할까 하다가 그냥 미소로 넘겼다. 


걷다가 만난 순례자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힘들게 하는 순간들이 있다. 며칠 전에 만난 스위스 순례자는 내가 한국 사람이라고 하자 반가워하며 자기의 친척 중에 베트남 사람이 있는데 정말 맛있는 베트남 음식을 만든다고 했다.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한국이랑 베트남이 차이점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하는 건지, 나도 내 친한 친구 중 핀란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 아냐고 받아쳐야 할지 몰랐다. 옆에 있는 일행이 자기가 더 민망했는지 ‘베트남이랑 한국은 너무 멀잖아.’라고 이야기했는데 그 순례자는 ‘내가 보기엔 너네 다 똑같이 생겼어 ‘라고 이야기했다. 


사실 그 말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악의가 없이 문외한 것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도 여기에서 하루에 많은 순례자들을 만나다 보면 오늘 만난 이 사람이 어제 만난 그 사람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처음 본 사람한테 ’ 우리 며칠 전에 만나지 않았어?‘라고 물어본 적도 있다. 다만 나는 너네들은 다 똑같이 생겼어라고 말하진 않았다. 그들이 똑같이 생긴 게 아니라 내가 익숙하지 않은 거니까. 그럼에도 무식함 때문에 나도 모르는 사이 무례함을 저질렀을 수도 있다. 나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반성을 하게 되었다. 세계사 공부도 열심히 하고 여행도 더 많이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례자들의 대부분이 이룬에서 시작해 순례길 첫째 주 차였다. 보통 순례길에서 첫째 주가 가장 힘들 때인데 이 중 내가 제일 힘들어 보였다. 보아하니 일상에서 등산이나 스포츠를 즐겨하는 사람들이 산 길이 많은 북쪽길을 많이 선택하는 것 같았다. 아프거나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저녁 8시쯤 사제들이 직접 만든 파스타와 빵이 저녁으로 제공되었다. 양이 엄청 많다고 생각했는데 음식은 금방 동이 났다. 저녁을 먹은 후 널어둔 빨래를 확인하러 갔는데 보일러실에 옮겨져 있었다. 환호성을 질렀다. 드디어 건조된 옷을 입을 수 있겠구나! 히터 옆에 양말도 널어둔 후 기분 좋게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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