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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백수 김한량 Nov 20. 2023

이렇게 살다 죽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

D+50 북쪽길 8일 차 

✔️루트 : Larrabetzu - Bilbao (약 17km)

✔️걸은 시간 : 5시간 15분





“이렇게 살다 죽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


빌바오로 가는 길 잠시 쉬기 위해 들린 카페에 앉아 하늘을 보다 문득 입에서 나온 말이다.


만약 이 생활을 계속할 수 있다면 덜어내야 할 한국에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생각보다 덜어낼 것이 많지 않았다. 더 많이 가지지 못한 것 같아 부끄러웠던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많지 않아 마음이 편하다는 생각이 든다.


문득 산티아고에서 만난 한국인 아주머니의 대화가 생각났다. 산티아고에서 묵던 알베르게에서 만난 분이었다. 정감 가는 경상토 사투리를 쓰시던 분이었다. 아주머니는 관광 중이셨는데 내가 순례길을 걷고 있다고 하자 놀라면서 왜 오기로 했는지 물으셨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어서 그런 건지, 아주머니가 가진 특유한 편안함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일기장에 쓰는 것보다 더 편하게 마음의 사소한 조각들을 꺼내놓았다. 아주머니는 조용히 내 얘기를 들으시다 한마디를 하셨다. 


"잘 사는 거 정말 별 거 없는데, 그쵸?" 


왜인지는 모르겠다. 갑자기 눈물이 울컥 쏟아졌다. 아주머니의 표정, 말투, 그날의 공기, 그날의 모든 것들이 북쪽길을 걷는 내내 마음속에 크게 남아있다.


며칠 전 우연히 SNS에서 본 박찬호의 인터뷰가 생각났다.


”지금 내가 가진 명예와 부는 한순간에 없어질 수 있고, 한순간에 없어지는 건 내가 아니다"


내가 나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하고 있는 일, 내가 이루어 낸 것과 이루고 싶은 것들. 내가 지키기 위해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투자했던 것들이 나의 본질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집에서 먼 곳에 떠나와 이름 없는 걷는 사람이 된 이후에도 나에게서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타인과 교감할 수 있는 감정, 시간을 만드는 미소, 세상을 느끼고 나눌 수 있는 감각 등, 나의 본질이자 가장 큰 자산은 내 깊은 내면 속에 있고 어디에 있어도 나와 함께 한다.


여기 나와 함께 하지 않는 것들은 내가 아니리라. 
이런 생각을 하다가 뮤지컬 <렌트>가 생각났다. 빌바오까지 남은 거리를 걸으며 오랜만에 뮤지컬 <렌트>의 사운드트랙을 들었다.



오백 이만 오천 육백 분 

Five hundred, twenty five thousand, six hundred minutes



525,000개의 소중한 순간들 

Five hundred, twenty five thousand moments so dear 



오백 이만 오천 육백 분 

Five hundred, twenty five thousand, six hundred minutes 



당신은 1년을 어떻게 측정합니까?

How do you measure, measure a year?



낮으로?, 석양으로?

In daylights, in sunsets 



자정으로?, 커피 잔으로?

In midnights, in cups of coffee 



인치로?, 마일로?

In inches, in miles 



웃음으로?, 다툼으로?

In laughter, in strife



오백 이만 오천 육백 분

In five hundred, twenty five thousand, six hundred minutes



인생의 1년을 어떻게 측정합니까?

How do you measure a year in a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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