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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백수 김한량 Sep 13. 2023

태어나서 처음으로 걷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D+5 포르투갈길 5일 차

✔️루트 : Santarém - Golegã(약 34km)

✔️걸은 시간 : 10시간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해 본 적이 없다. 집에서 500m 떨어진 곳에 마트가 하나 있는데 난 이곳까지 걷는 게 싫어서 차를 꼭 가지고 간다. 차보다 대중교통이 빠를 때가 많은데도 지하철 역 안에서 걷는 게 싫어 어딜 가더라도 꼭 차를 가지고 다닌다. 그런데 나는 지금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있다.


사람들은 걸을 때 생각이 정리가 된다는데 나는 더 생각이 많아지고, 오래 걸을수록 머릿속이 시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걷는 것보다는 러닝이나 등산같이 숨이 차 생각을 할 겨를이 없는 활동들을 선호했다. 내가 그나마 조금씩 걷기 시작한 것은 작년 수술 후 체력이 갑자기 나빠진 이후였다. 걷기만 해도 숨이 찼기 때문이다.   



이틀 동안 선물 같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 따듯했다. 그럼에도 다시 찾아온 혼자만의 시간은 반가웠다.



순례길에서 만난 순례자들은 걷는 방식도 제각각이다. 산티아고에 하루빨리 도착하기 위해 온몸의 통증을 인내하며 빠른 걸음으로 걷는 사람, 굳이 산티아고 완주를 목적하지 않고 순례길을 벗어났다가 돌아오길 반복하며 걷는 사람, 그날의 풍경과 우연의 만남을 즐기며 걷는 사람, 관광 온 기분으로 걷는 사람.


나 같은 경우는 정해진 루트를 따라가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지도 앱의 GPS를 계속 확인하며 골목 하나라도 벗어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걸었다.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순례길이 아닌 것 같아 불안했다. (경찰이 와서 '당신은 순례자가 아닙니다'라며 크리덴셜을 빼앗아 갈 일도 없는데 말이다.) 평소에도 걷는 걸 좋아해서 순례길에 왔다는 사람들이 나보다 빠르게 걷는 것이 당연한데도 뒤쳐지면 또 불안했다.    



‘내가 2시간동안 갈 거리를 쟤네들은 10분 안에 도착하겠지.’ 라는 쓸데 없는 생각을 하곤한다.



지금까지 자전거를 타거나 운전하는 방법은 알았지만 걷는 방법은 잘 몰랐던 것 같다. 걸을 땐 항상 과거의 실수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 평소보다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의 에고는 '더 잘해야 해', '더 열심히 해야 해' 라며 걷고 있는 나를 질책하고 조롱했다.


낯선 타지에 온 지금에서야 걷는 법을 제대로 배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내가 어디를 가고 있는지, 맞는 길을 걷고 있는지를 확인하기보다는 걷는 순간에 집중하는 감각을 배우고 있다. 항상 내 손에 들려 있던 휴대폰은 주머니에 넣어두고 GPS가 아닌 현재 나의 상태를 확인하며 걷고 있다. 일부러 다른 길로 걷기도 하고, 재미있는 식물을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내가 어디를 지나왔고 도착하게 될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걷고 있고, 앞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버려진 자동차를 내가 지나쳐 갈 때도 있다.


밭 길을 한 참을 걸을 때였다. 차 엔진 소리, 새소리 하나 없이 주변이 고요했다. 나 자신의 숨소리만이 귀를 가득 채웠다. 그러다 달팽이관 너머로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에게 원하는 만큼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화가 난다고 했다. 자신은 지금까지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고 그것이 너무 수치스럽다고 했다. 자신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인 것 같아 괴롭다고 했다. 그래서 무엇을 해도 만족되지 않는다고 했다.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었다. 나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칭찬받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나의 에고의 목소리였다. 나를 지배하고 있던 녀석이었다. 나는 녀석의 말을 조용히 다 들었다. 그리고 질문했다.


'인정을 통해 네가 얻고자 하는 것이 뭐야? 그것을 얻게 된다면 어떤 기분이 들 것 같아? 그럼 현재 너의 본질이 바뀌게 되니?‘


녀석은 오랫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 없이 얘기했다.


'아니, 바뀌지 않아. 아마도.'



드디어 마을 도착! 오늘따라 유난히 해 질 녘 하늘이 아름다웠다.



다양한 순례자들의 다양한 걷기 방법 중 어느 하나 틀리거나 맞는 걷기 방법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각자 자신의(혹은 선택한) 속도가 있고 방식이 있다. 그리고 나도 나만의 걷기 속도와 방식을 배워가는 중이다. 맨날 걷던 길 위에서.



같은 하늘에 떠 있는지는 해와 뜨는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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