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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백수 김한량 Sep 12. 2023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회귀점이 없다

D+4 포르투갈길 4일 차

✔️루트 : Valada - Santarém (약 19km)

✔️걸은 시간 : 5시간






다른 순례자들은 꽤나 일찍 하루를 시작했다. 6시 30분쯤 거실로 나와보니 이미 떠난 이들도 있었고 막 떠날 채비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길을 떠나는 순례자들과 서로의 무탈을 빌며 포옹을 나누었다. 어젯밤 나와 같은 방에 묵은 프랑스 커플은 이제 막 아침식사를 시작 중이었다. 나도 그 옆에 앉았다. 나는 프랑스어를 못한다. 프랑스 순례자 중 남편 존마리는 약간의 영어를 할 수 있었고 아내 샹탈은 영어를 하나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우리는 서로의 말을 기똥차게 잘 알아들었다. 나도 내가 저들의 말을 어떻게 알아듣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보니 꽤나 긴 시간 동안 아침식사를 함께 했다.


식사 후 존마리와 샹탈은 먼저 길을 떠났고 나는 숙박비 계산을 위해 남았다. 알베르게 주인은 내가 이곳에 머무른 시간에 책정된 가격은 없으니 내가 원하는 만큼만 주고 가라고 했다. 따듯함을 돈으로 환원하라니, 살면서 처음 받아 본 미션이었고 나에게는 너무 어려운 미션이었다. 내가 받은 마음들만큼 큰돈은 나에게 없었다. 결국 어떠한 가격도 제시하지 못했고 주인이 대신 나의 일을 해주었다. 살면서 가장 행복한 지불이었다.



좋은 길 되세요! 포르투갈어로는 'Bom Caminho'인데 나 혼자 스페인어로 'Buen Camino'를 외쳤다



길 위에서 다시 프랑스 커플을 만날 수 있었다. 존마리와 샹탈은 지난 몇 년간 매년을 함께 순례길을 걸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들도 순례길에서 처음 만났다고 했다. 산티아고로부터 서쪽으로 90km 정도 계속 걸어가면 세상의 끝이라고 불리는 '피니스테레'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곳에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고 했다.


피니스테레(Finisterre)는 스페인 이베리아반도의 최서단 지점에 있는 마을이다. 고대 로마인들이 영역을 넓혀가던 시절 이곳이 서쪽 대륙의 끝이라고 믿고 ‘최후(Finis)의 땅(terr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후에도 한동안 로마인들은 이곳이 세상의 끝, 하루의 해가 죽음을 맞으러 오는 곳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얼마나 로맨틱한 스토리인가. 세상의 끝에서 피어난 사랑이라니. 그리고 존마리는 0km 순례자 표지판은 산티아고가 아닌 피니스테레에 있다고 말했다. 0km, 세상의 끝, 사랑이 시작하는 곳. 오늘 도착할 마을의 이름은 못 외웠지만 피니스테레는 뇌 장기저장소에 깊게 박혔다. 이번 기회에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존마리(남성 순례자)는 이번이 다섯 번째 순례길이라고 했다. 같은 길을 두 번 걸은 적도 있다고 했다. 세상에는 볼 것도 많고 유럽에는 갈 곳도 많을 텐데 같은 길을 또 걷는다니, 나로선 잘 이해되지가 않았다. 그에게 순례길의 어떤 점이 좋냐고 물었다.


"보통의 여행은 숙소가 되었든, 차가 되었든 언제나 회귀를 해야 해. 순례길은 그렇지 않아. 우리는 계속 앞으로만 걸어. 그리고 한번 지난 길은 뒤돌아 보지 않아. 나는 그 점이 좋아."


그의 대답은 내 머릿속에서 인생의 이미지로 펼쳐졌다.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시간은 앞으로만 흐른다. 인생에 회귀점이란 없다. 순례길을 걸을 땐 지난밤 묵었던 숙소가 얼마나 좋았든 그곳에 다시 돌아갈 일은 없다. 그리고 내가 어제 좋은 숙소에 묵었다고 해서 오늘 밤, 혹은 내일도 좋은 숙소에 묵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과거나 얼마나 화려하거나 혹은 하찮았든 그것은 지금이 아니고 내가 어떤 미래를 기대하든 역시 지금이 아니다.


많은 시간을 과거의 실수나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보내왔던 나의 모습과 이들과 함께 걷고 있는 오늘, 지금의 나의 모습이 중첩되었다. '과거나 미래를 살지 말고 현재를 살아라'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말이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쉽던가. 하지만 지금까지 머리로만 이해하던 말들이 순례길 위에서 무슨 뜻인지 체험적으로 와닿았다. 이때의 존마리의 대답은 이후에도 오래 내 가슴속에 남았다.  

 


산티아고순례길 노래를 부르며 걷는 존마리와 샹탈



Tous les matins nous prenons le chemin, 매일 아침 우리는 길을 떠납니다.

Tous les matins nous allons plus loin.  매일 아침 우리는 더 멀리 나아갑니다.

Jour après jour, St Jacques nous appelle,  날마다 성제임스가 우리를 부릅니다.

C’est la voix de Compostelle.  콤포스텔라의 목소리입니다.

Ultreïa! Ultreïa! E sus eia Deus adjuva nos!  조금 더! 조금 더! 신이 우리와 함께 걷습니다.


Chemin de terre et chemin de Foi, 땅의 길과 믿음의 길,

Voie millénaire de l’Europe,  고대 유럽의 길,

La voie lactée de Charlemagne, 샤를마뉴의 은하수,

C’est le chemin de tous les jacquets.  그게 방황하는 우리의 길입니다.

Ultreïa! Ultreïa! E sus eia Deus adjuva nos!  조금 더! 조금 더! 신이 우리와 함께 걷습니다.


Et tout là-bas au bout du continent, 그리고 대륙의 끝에서

Messire Jacques nous attend, 성제임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요.

Depuis toujours son sourire fixe, 변함없는 미소를 지으며

Le soleil qui meurt au Finistère. 피니스테레에서 지는 해를 향해

Ultreïa! Ultreïa! E sus eia Deus adjuva nos!  조금 더! 조금 더! 신이 우리와 함께 걷습니다.



이들은 걷는 내내 노래를 부르며 걸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오래전부터 순례자들 사이에서 불려졌다는 산티아고순례길 노래라고 했다. 샹탈은 나에게도 한 곡을 부탁했다. 처음 듣는 한국 노래일 텐데 K-pop을 소개해줘야 하나, 그럼 방탄소년단 노래가 제일 나으려나, 아닌가 역시 한국은 발라드인가 고민하다 이들이 부른 노래와 비슷한 리듬의 심수봉의  '천 만 송이 장미'를 답가로 불렀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마음속에서 이들보다 느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려도 한참 어린데 뒤쳐지면 자존심이 상한다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하지만 이들의 빠른 걸음 속도에 맞춰 걷다 보니 금방 지쳤다. 결국 둘을 먼저 보냈다. 누군가와 함께 걷다가 뒤처지는 것은 그렇게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대화를 하며 걷다가 조용히 혼자 걸으니 적적하기도 했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 그늘에서 쉬고 있는 존마리와 샹탈을 다시 마주쳤다. 걷다 보니 우리보다 한참 먼저 출반 했던 순례자들도 만났다. '굳이 열심히 다른 사람의 걸음 속도를 맞추려 노력할 필요가 없다. 내가 필요할 때 쉬는 것이 꼭 뒤처지는 게 아니구나...' 생각했다. 우리는 함께 걸으며 대화를 하다가 조용히 걷고, 멀어지고 다시 만나기를 반복했다.




언덕 위에 보이는 Santrém


Santrém은 언덕 위에 있는 마을이었고 배낭을 멘 후 처음으로 오르막을 맞이했다. 오늘따라 날이 유난히 더웠고 중간에 그늘도 없어서 꽤 힘들었다. 여름에는 더 걷기가 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 도착 후에는 방을 예약하지 않았기 때문에 빠른 걸음으로 숙소로 향했다. 대문이 닫혀있었다. 내가 도착한 시간은 2시였는데 3시에 여는 듯했다.


지난밤 함께 저녁을 먹은 순례자들에게 알베르게 문화에 대해 들었다. 본래의 문화는 미리 예약을 받지 않고 먼저 도착하는 순례자들에게 숙소를 제공해 주고 가격도 순례자가 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빨리 도착한 순례자들은 알베르게 대문 앞에 자신이 먼저 도착했다는 표식을 남기기도 한다고 했다.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먼저 도착했다는 표식을 남기기 위해 손수건을 대문에 걸어놓고 근처 카페에서 쉬었다.



'내가 먼저 왔어요' 표식



나는 천재다. 에스프레소를 주문하며 얼음을 달라고 했다. 그리웠던 아아. 아아 제조하고 광명 찾다!


3시에 다시 알베르게에 돌아왔을 땐 손수건이 사라져 있었다. 문 앞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던 순례자들을 잠시 의심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땐 이미 손수건이 없었다고 했다. 생각과는 다르게 별로 낭만적이지 않은 경험이 되었다. 알베르게 앞에 많은 사람이 앉아 있어 놀랐는데 알고 보니 이들은 한 가족이었다. 미국에서 온 순례자들이었는데 5명이 함께 순례길을 걷고 있다고 했다. 내가 아직 방을 예약하지 않았다고 하자 자신들이 6인실을 예약했고 함께 묵자고 제안해 줬다. 오늘도 무사히 방을 구할 수 있었다.




이때만 해도 이 날 우연히 만난 미국인 가족이 나의 제 2의 가족이 될 줄은 몰랐다.



순례길에 오기 전 360도 카메라를 샀다. 처음 접한 신문물에 신이 나서 그동안 영상을 많이 찍었는데 내가 생각한 백업프로세스가 작동이 안 되었다. 큰 일 났다 싶었다. (영상 제작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나는 파일 백업에 누구보다 진심이다.) 휴대폰 젠더가 필요했다. 짐을 풀자마자 필요한 젠더를 찾아 몇 시간을 걸었다. 꽤나 큰 마을이어서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슈퍼, 전자제품점 등 여러 매장에 들러도 내가 필요한 젠더는 없었다.


"China Shpping에 한 번 가봐"


우리나라로 치면 하이마트 같은 큰 전제제품 매장의 점원이 중국인 마트에 가보라고 조언해 주었다. 아니 전자제품 매장에도 없는 물건을 중국 마트에서 어떻게 구해.... 있었다. 중국 마트에는 진짜 없는 게 없었다. 먼 타지에서 만난 전자공업 강국 친구가 너무 반가웠다. 백업에 성공 했다면 BFF(Best Friend Forever)가 되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방법도 실패했다.




젠더를 찾기 위해 추가로 10km를 더 걸었다..... 그러나 결국은 만났다 친구!



컴퓨터가 필요했다. 알베르게 프런트에서 사용하는 노트북을 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용량이 큰 360도 영상을 옮기기에 사양이 턱 없이 부족했다. PC방도 없고 어쩌지 고민했다. 현실적으로 가장 빠른 방법은 데이팅 어플을 깔아서 매칭되는 이에게 ‘혹시 쓰는 컴퓨터 사양이 어떻게 되니? 오 사양 좋네. 만날까?‘라고 물어보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상상의 나처럼 용감하지 못했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어제 묵었던 숙소 주인에게 전화를 했다. 이 친절한 양반은 내가 오늘 5시간 동안 걸었던 거리를 차로 15분 만에 와주었고 영상을 백업받는 동안 함께 식사를 하기로 했다.


이제는 친구가 된 알베르게 주인, 함께 온 핀란드 친구, 유쾌한 둘 덕분에 예상치 못한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냈다. 한참을 수다를 떨다 보니 가게 문이 닫을 시간이었고 밖에 나와서도 한참을 시끄럽게 떠들었다. 또 보자는 기약 없는 약속을 한 뒤 헤어졌다.


까미노에서 만난 사람들은 어쩜 하나 같이 이렇게 다 아름다운가... 진지하게 생각하다가 잠에 들었다.  




해질녘이 아름다운 Santrém에서의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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