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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백수 김한량 Nov 23. 2023

파우스트적 인간

D+53 북쪽길 11일 차

✔️루트 : Portugalete - Sámano (히치하이킹 4km 제외 약 22km)

✔️걸은 시간 : 6시간 7분






소울푸드를 찾았다. 카페에 가면 어딜 가도 핀쵸스를 파는데 오믈렛에 빠졌다. 계란과 감자로 만든 오믈렛인데 원래 감자와 계란을 좋아하기도 하고 소화도 잘 된다. 무엇보다 1~2유로의 가격으로 저렴한 가격에 배를 채울 수 있어서 가성비 최고인 것 같다. 덕분에 슈퍼만 보면 장을 봐야 한다는 강박에서도 벗어났다.


오늘도 숙소에서 나오자마자 카페에서 카페콘레체를 한 잔 마시고 시작했다. 아직 기침을 하지만 점점 컨디션이 좋아지는 것을 확실히 느낀다. 오늘은 조금 더 가벼운 발걸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항구도시를 지나니 이제 해변길이 나왔다. 석회암 산들과 함께 어우러진 해변길의 풍경이 묘하게 이국적면서 아름다웠다.






걷는 것 자체를 즐기던 전과는 달리 요즘은 걸을 때 무료함을 느낀다. 누군가와 함께 걷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의외로 길 위에서 다른 순례자들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이게 내가 보통 순례자들이 걷는 시간과 달라서 인 것을 깨달은 것은 한참 뒤였다.) 포르투갈 길을 완주하고 북쪽길을 시작할 땐 이제는 사람들과 함께 걷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사람들과 마주치는 것 자체가 힘들었고 조금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느낀 외로움은 내가 일상에서도 느끼는 외로움을 연상시켰다. 


나는 일을 시작한 이후로는 거의 모든 시간을 프리랜서로 살아왔다. 내가 하는 일은 많은 부분 나의 자율성에 기댔기에 내가 나의 상사이자 보조였다. 언제부턴가는 직장인들을 동경했다. 만원 버스를 타고 출근하고 점심시간엔 줄 서서 밥을 먹고, 출퇴근 시간이 확실한 직장인들. 이들을 볼 때면 나만 혼자인 것만 같은 느낌, 나만 소외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다. 물론 비교적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자유가 있지만 그 자유를 잘 경영하는 방법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오늘따라 유난히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이 시간을 함께 나누고 기억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 실감 났다. 감사보다는 외로움이 먼저 올라온 것이다. 이렇게 혼자 걷다가 끝나면 어쩌지라는 두려움도 생긴다. 이전에 사주를 봤을 때 외로운 사주라는데 순례길 위에서 마저도 그런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선택한 것은 오디오북이다. 오늘은 괴테의 파우스트 오디오북을 걸으며 들으며 걸었다. 파우스트를 선택한 건 한 문장 때문이었다. 



‘나는 한결같이 이 세상을 달려왔을 뿐이다.'



한 교수는 ‘달린다’는 표현을 근대적 속도라고 해석했다. 그리고 근대의 파우스트적 인간들의 추동은 성취하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이야기했다. 이 소설은 순례길을 걷고 있는 나에게 욕망과 속도라는 측면에서 큰 의미로 다가왔다. 사실 나에게 은 달리기보다는 자동차의 속도가 더 익숙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동차의 속도가 내가 살아가야 하는 속도라 착각하며 내가 채 다 인식하지 못 한채 빠르게 흘러가는 많은 풍경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는 것에 항상 마음이 바쁘다. 내가 놓친 것 풍경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말이다. 앞에 있는 것을 잘 보지 못하니 저 멀리 지평선에 있는 평화로워 보이는 산 봉우리를 동경한다. 


채워지지 않은 지적 갈증으로 세상의 본질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다 결국 자살시도까지 하는 파우스트. 현재의 나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는 무언가를 성취하려는 나의 모습이 보였다. 소설에서 악마는 굉장히 합리적인 조언을 한다. 이 또한 내 머릿속의 목소리와 닮아있어서 재미있었다. 


거의 두 달째 걷는 일만 하고 있다. 차로 10분이면 갈 거리를 몇 시간에 걸쳐 걷는 속도로 살아보는 경험은 처음이다. 나에겐 당연한 세상이자 종교이던 자본주의 사회와 그 안에서 살아온 나의 삶의 속도에 대한 질문이 든다. 나는 그 속도가 버겁다. 매일 아침 일어나 오늘은 얼마나 걷고 어디에서 멈출지 고민한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가서 내가 살아갈 속도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걷는 길의 풍경은 오늘따라 유난히 아름다워 자주 걸음을 멈추며 그 풍경을 충분히 마음에 담았다. 이미 저녁 7시가 되었지만 너무 아름다운 곳에 있는 식당을 발견했다. 알베르게가 걱정이 되었지만 이곳에서 저녁을 먹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 음식을 주문했다. 



식당에서 바라본 풍경


밥을 먹고 알베르게에 전화하니 이미 리셉션이 마감했다고 했다. ‘어플에는 10시까지라고 적혀있는데 ㅠㅠ’라고 우는 소리를 하니 ‘빨리 오면 받아줄게’라고 했다. 아직 4km 정도가 남았기에 무리해서 걷기보다는 히치하이킹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식당에서 떠나려는 차를 잡았다. 알베르게가 있는 Satullan이라는 마을을 지나가는지 물었다. 서퍼들처럼 보이는 무리는 가까우니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차 안에서 이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이곳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 무리였다. 오늘도 바다에서 시간을 보내다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리곤 
혹하는 제안을 해왔다. 혹시 잘 곳이 필요하면 자신들의 아지트가 있는데 거기에서 자도 된다고 했다. 가난한 순례자는 바로 혹했다. 아지트를 확인할 것도 없이 바로 알베르게에 못 간다고 전화를 하고 그들의 아지트로 향했다.



오늘의 알베르게!



이들의 아지트는 Sámano라는 마을에 있었다. 도착하니 더 많은 친구들의 무리가 있었다. 작은 땅에 컨테이너 두 개와 작게 가꾼 밭이 있었다. 컨테이너 안에는 여러 공구와 함께 소파 하나가 있었다. 친구들은 불편하면 알베르게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는데 내 눈엔 너무 완벽해 보였다. 
짐을 정리하고 쉬다가 친구들과 바에 가서 술 한잔을 했다. 와인과 콜라를 섞은 술이었는데 이 지역에서 많이 먹는 술이라고 했다. 대화를 하다가 이들이 바스크어를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오늘 바스크컨트리에서 칸타브리아 지방으로 넘어온 것이다.


샤워실이 없는 관계로 씻는 건 간단히...!
매일 저녁 하는 발과 다리 마사지
좋은 친구들과 좋은 시간
친구들이 챙겨 준 음식들... 감동 받았음 ㅠㅠ



나를 아지트에 데려다주며 친구들이 아침에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챙겨주었다. 이런 아름다운 청년들이 있나… 이 우연치 않은 만남과 친절에 마음이 너무 따듯해졌다. 
나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카우치서핑으로 한국에 오는 여행자들에게 숙소를 제공해 주곤 했었는데 코로나도 끝났으니 한국에 가면 꼭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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