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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백수 김한량 Nov 25. 2023

정말 예뻤던 Islares 가는 길

D+54 북쪽길 12일 차 

✔️루트 : Sámano - Liendo (27km)

✔️걸은 시간 : 8시간 14분






친구들의 따듯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오랜만에 잠을 정말 잘 자고 일어났다. 덕분에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아지트는 운이 좋게 순례길에 있는 마을이었기에 바로 걷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 마을에서 좋은 기억이 생겼으니 크리덴셜에 도장을 받을 겸 카페에 들렀다. 점원에게 도장을 찍어달라 하니 점원이 당황을 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모든 가게에는 가게 이름이 새겨진 도장이 있다. 그런데 이곳은 보기 드문 도장이 없는 카페였다. 그래도 추억이니 점원의 사인이라도 해달라고 했다. 이 말을 전달하는데 언어가 안 되니 어려움이 있었다. 옆에서 에스프레소를 홀짝 거리던 할아버지가 나의 말을 점원에게 전달을 해주셨다. 그리고 커피도 사주셨다. 


'뭐지, 이 마을은… 아침부터 겁나 따듯하네…' 


할아버지는 군인으로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살아오셨다고 했다. 그때 영어도 배우셨다고 했다. 카페에 아침 와인(아침부터 술이라니…대단)을 마시러 온 마을 사람들은 ‘오~너 영어 좀 하는데~’하며 할아버지에게 말을 걸어왔다. 할아버지는 집안일을 하러 인사를 하고 떠나셨다. 


석회산. 저 산을 깎아 시멘트를 만든다고 한다.




걷기 시작 후 얼마 안 되어서 Castro-Urdiales가 나왔다. 이 마을은 작은 항구도시였는데 작은 골목마다 바가 가득했고 해안선 끝 가장 높은 곳에는 성당이 있었다. 한껏 꾸민 사람들이 성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무슨 결혼식이 있나 싶어 구경하기 위해 따라가 보았다. 알고 보니 오늘은 어린아이들의 세례식이 있는 날이었다. 구경하기 위해 배낭을 잠시 내려놓고 가족들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예쁘게 차려입고 긴장반 설렘반으로 앉아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아마 14세기 이전에 지어진 이 오래된 성당 안에서 진행되는 세례식은 그 분위기만으로도 정말 아름다웠다. 








이후 Islares라는 마을로 향하는 길은 너어어어무 예뻤다. 한쪽에는 2000m가 넘는 높이의 산이, 다른 한쪽에는 바위 절벽과 함께 펼쳐진 해안선이 있었다. 중간에 아빠에게 전화가 왔는데 풍경에 정신이 팔려서 제대로 대화를 못 하고 끊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오늘은 아빠 생신이었다. 어버이날도 잊고 지나간 걸 나중에 깨달았다. 


오늘은 알베르게가 뭔가 애매했는데 너무 가깝거나 너무 멀거나였다. 걷다 보니 20km 거리에 있는 알베르게까지 걷기로 했다. 걸으며 단테의 신곡 오디오북을 들었다. 소설은 인생의 가운데쯤 와서 어두움에 숲에 빠진 자신을 발견한 단테로 시작한다. 소설 속 단테의 나이가 나와 비슷했기에 처음부터 감정이입하여 들을 수 있었다. 단테는 산 몸으로 지옥, 연옥, 천국을 여행한다. 나는 이 여행을 종교적 의미보다는 마음 상태로서 이해했다.




내가 특히 재미있게 생각한 부분은 많은 예술가, 철학가들이 지옥에 있다는 것이었다. 인문학 철학 등에서 대단한 업적을 남긴 그들이 자신 스스로의 행복 혹은 광명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 크게 다가왔다. 대단한 예술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창작 활동을 하며 지내며 느끼는 여러 가지 고통의 경험이 있기에 왜 저들이 지옥에 있는지 이해가 되었다. 자아성찰과 질문들은 마치 자기 이해를 통해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믿어진다. 그러나 사실은 반대에 가깝다. 내가 나에게 하는 많은 질문들은 나를 천국으로 안내하진 않는다. 사실 지옥(반드시 부정적 의미가 아닌)에 가까운 이미지이다. 훌륭하다 평가받는 선조들의 길 잃음과 고통의 이야기는 어떤 의미에서 나에게 많은 위로를 주었다. 






순례길에 오르기 전과 걸으면서 눈을 감으면 내가 나를 죽이는 이미지가 보였다. 활을 쏘기도 하고, 칼로 쑤시기도 하고, 산의 중턱에서 목을 메달기도 했다. 죽은 나를 부여잡고 울기도 하고 용서하기도 했다. 나는 이 이미지들을 내가 수치스러워하는 자아들에 대한 마음으로 이해했다. 순례길을 걸으며 이런 이미지는 점점 희미해져 갔다. 생각해 보면 죽음은 나에게 아주 가까운 문제이다. 어떤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나는 ‘만약 내가 내일 죽는다면’이라는 명제를 붙여 생각하곤 한다. 죽음에 가까웠을 때 나는 어떤 모습이고 싶은가가 내 인생의 큰 추동이 된다.






천천히 풍경을 구경하며 걷다 보니 시간이 금방 지났다. 저녁 7시쯤 알베르게에 전화했다. 다행히 남은 침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남은 시간을 편안한 마음으로 걸을 수 있었다. 해 질 녘이 되어서야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1층에 성당 합창단 연습실이 있었는지 아름다운 성가의 하모니가 나를 반겼다. 알베르게 담당자가 도착하기 전이었지만 일단 양말과 옷들을 벗어젖혔다. 세탁기가 눈에 들어왔다. 옷에 베인 땀 냄새가 장난이 아니다. 다 안 마를 테지만 무조건 다 빨아야지. 


세탁기에 가지고 있는 거의 모든 옷을 다 집어넣고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고 나니 배가 고파 따듯한 차와 커피를 마셨다. 내가 하루를 마무리하는 와중에 다른 순례자들은 이미 잠자리에 들었다. 조심히 침대에 올라 아픈 다리와 발을 마사지했다. 뭔가 쉽게 잠에 들지 못했고 화장실을 가려고 1층에 내려왔는데 한 사람이 ‘케이크 먹을래?’라고 물었다. 이도 닦았고 잠자리에 들 참이었지만 케이크를 거절하기 힘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사람도 순례자였고 성가대 사람들이 주고 간 케이크라고 했다. 웬만해서 너무 단 음식은 안 먹으려고 노력해 왔기에 오랜만에 맛보는 속세의 설탕 덩어리는 유난히 맛있었다.


케이크를 먹으며 순례자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중 독일 순례자는 청소년 복지센터에서 활동가로 일을 했다. 활동의 일환으로 배정된 비행 학생과 순례길에 왔다고 했다. 꽤나 도전적인 매일을 보내고 있는 듯했다. 완주 가능성에 대한 확신은 없는 듯했다. 실효성과는 다르게 아주 흥미로운 프로젝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케이크를 먹다 보니 배가 터질 정도로 먹어 버렸다. 그런데 입은 행복했다. 이를 또 닦기 귀찮아서 그냥 대충 물로 헹구고 침대에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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