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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백수 김한량 Dec 10. 2023

내 집 같은 편안함, 마법의 커튼

D+ 58, 59 북쪽길 16, 17일 차

✔️Santander 휴일







Santander에서 묵은 알베르게는 아주 혁신적이었다. 침대들이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거리를 두고 배치되어 있어 옆 침대 사람과 한 침대를 쓰는 듯한 따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샤워실 문이 통유리라 샤워 중 화장실을 이용하러 들어온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그중 최고는 기상시간이었다. 아침 7시가 되자 관리자가 순례자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이 누워 있는데 빈 침대들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좁은 침대 틈을 비집고 들어와 청소를 하니 짐을 싸야 하는 건지 청소가 끝나길 기다려야 하는 건지도 헷갈렸다. 8시에 체크아웃인 건 알겠지만 너무 했다. 아침에 너무 기분이 안 좋게 일어났다. 쫓겨나듯이 밖에 나온 후 걷고 싶은 생각이 전혀 안 들었다.


사실 알베르게 때문만은 아니었다. 북쪽길을 걷는 내내 누적된 피로로 매일이 힘들었다. 굳은 온몸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나의 상태보다는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강박으로 걸었다. 그런데 오늘은 정말이지 걷기 힘들었다. 마치 진흙 위를 걷듯이 매 발걸음이 땅 속에 파묻히는 것처럼 무거웠다. 결국 알베르게에서 100m도 걷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카페로 들어갔다.


'일지를 쓰는 게 걷는 것만큼 중요하니 밀린 일지를 쓸 겸 늦게 출발하자!'


핑계는 일지였다. 샌드위치와 커피를 시키고 한참을 일기를 써 내려갔다. 집중해서 쓰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어갔다. 그 사이 샌드위치 2개, 커피를 한 잔 더 마셨다. 그런데 아직도 걸을 용기가 안 났다.


'어서 출발해야지...'


마음과는 다르게 나의 무의식은 어느새 지도 어플을 켜 주위에 있는 숙소를 알아보고 있었다.


'그래! 하루 쉬면서 일지를 다 써버리자!'  


구글 지도에 숙소를 검색하자 일전에 한 순례자에게 추천받았던 호스텔이 보였다. 고민 없이 그곳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체크인이 오후 3시였기에  밥도 먹고 필요한 물건들을 쇼핑하며 기다렸다.



혹시 영양 부족인가 싶어 최대한 다양한 음식을 먹으려 노력했다


도착한 호스텔은 생각보다 더 좋았다. 침대 프레임 자체가 박스형으로 되어있는 곳이었는데 각 공간에는 커튼이 달려있었다. 얇은 커튼 한 장의 차이는 엄청난 마법을 가져왔다. 지금까지 도미토리에 묵으며 특별히 불편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지만 커튼을 치고 나니 지금까지 계속 긴장되어 있던 근육들의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집에 온 것처럼 아늑했다.


커텐 만세!!!


원래 하루만 쉬어 가려했지만 너무 좋아서 하룻밤을 더 결제했다. 옷을 벗어던지고 바로 낮잠을 잤다. 자고 나면 피로가 풀릴까 했지만 자고 나니 오히려 더 피곤했다. 간단히 밥을 차려 먹고 침대 위에 작은 공방을 꾸몄다. 어제 바닷가에서 열심히 주워 온 조개들과 오늘 뜨개질샵에서 사 온 재료들로 나만의 작은 순례자 표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순례길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에게 줄 작은 선물이었다.  


Güemes의 알베르게에서 본 ‘El Camino de La Vida(인생의 길)’이라는 문장과 ‘Buen Camino(좋은 길 되세요)’를 합쳐 ‘좋은 인생 길 되세요’라는 메시지를 담고 싶었다. 두 문장을 조합해서 ‘Buen Camino de La Vida'라고 적고 빨간 끈도 단 후 아주 만족하며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뜬 후 노파심에 구글번역기에 내가 쓴 문장을 번역해 보았다.


Buen Camino de La Vida  = 좋은 삶의 길


오마이… 응원 메시지가 아닌 인문학 서적 제목이었다. 마커로 적은 걸 지울 방법이 없었다. 여러 문장으로 번역기를 돌려보다 결국은 'd'를 하트로 변신시키고 영어로 'in'에 해당하는 'en'으로 바꾸는 데에 성공(?)했다.


Buen Camino ❤️ en La Vida


 제대로 된 문장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산탄데르 구경~!


오늘은 천천히 마을 구경을 다녔다. Santander는 칸타브리아의 대표도시답게 볼거리도 많고 아름다운 건축물도 많았다. 하지만 바닥난 체력 때문에 한 시간을 채 걷지 못하고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은 후 바로 호스텔에 돌아와야 했다. 본래 이 쉼의 주목적은 밀린 일지 쓰기였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너무 피곤해서 아무 생각도 안 나기 때문이다.


쉬면 쉴수록 오히려 더 피곤한 느낌이다. 하루 이틀 쉬어서 해결될 피로는 아니구나 싶다. 온몸이 아프다. 내 방 침대에서 자고 싶다. 찌개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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