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반백수 김한량 Jan 07. 2024

첫 수영, 첫 음주, 첫 블랙리스트

D+64 북쪽길 23일 차 

✔️루트 : Pendueles - Llanes(약 16km)

✔️걸은 시간 : 4시간 54분






오늘 만난 풍경들~! 정말 아름다웠다




북쪽길은 기본길(?)과 해안길 중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많다. 그동안 어플을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을 몰라 눈에 보이는 화살표만 따라 걸었었는데 어제 룸메에게 해안길을 보는 방법을 배웠다. 하여 오늘은 해안길을 따라 걸었다. 걷는 길 왼쪽에는 아름다운 해안선이 오른쪽에는 높은 산이 있어서 어느 쪽을 바라봐도 눈이 즐거웠다. 지금까지도 걷다가 정말 아름다운 해변이 많았는데 해안 절벽들이 동그랗게 떨어져 나간 모양 덕분에 프라이빗한 해변을 만들고 있었다. 지금까지 물에 들어간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들어가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 해변을 만났다. Playa de Ballota라는 해변을 보자마자 탄성부터 나왔다.





'와 여기가 산티아고다.'


해변에 닿으려면 한참을 내려가야 했지만 그냥 지나가면 후회할 것 같아 기꺼이 내려가기로 했다. 해변을 포근하게 감싸는듯한 지형이 고요하고 프라이빗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고민 없이 수영복으로 환복하고 물 안으로 들어갔다. 물의 온도가 몸과 발의 열기를 금방 식혀주었다. 뜨거운 아스팔드 바닥을 밟느라 고생하던 발바닥이 찌릿찌릿했다. 바다 안에서 바라보는 절벽의 풍경이 정말 아름다웠다. 물아래의 곱고 새하얀 맑은 바다의 색이 어우러져 맑고 예뻤다. 물에서 나와 판초를 깔고 한참을 눈을 감고 있었다. 몸을 물에 적시고 나오니 덥지도 않고 딱 좋은 온도였다.






오늘은 순례길에서 만났던 친구와 Llanes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한 날이었다. 충분히 해변을 즐기다가 3시쯤 친구를 만나기 위해 길에 나섰다. 친구는 나보다 하루 정도의 일정을 빠르게 가고 있었기에 오늘 하루를 날 기다리는 데에 썼다고 했다. 나에게 꼭 전달해 줄 물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내가 며칠 전 만났던 미국 순례자 중 한 명이 나에게 선물한 묵주였다. 그는 내가 처음 외할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들었을 때 나에게 큰 위로를 주었던 순례자였다. 그가 떠나기 전 나를 생각해 묵주를 친구에게 맡기고 갔다고 했다. 완전 감동이었다. 나를 위해 하루라는 시간을 할애해 준 친구에게도 너무 고마웠다. 한번 스친 인연들에게 이렇게 큰 마음을 받게  한국에서 꼭 다시 보자는 약속을 하고 작별인사를 했다.




오늘의 알베르게!
미사 때 만난 노부부


친구와 시간을 보내다 보니 금방 저녁이 되어 이 마을에 묵기로 했다. 알베르게에 도착해 짐만 풀고 성당에 갔다. 오래된 세월을 안고 있는 건물과는 다르게 여러모로 첨단시설을 갖춘 성당이었다. 미사 전에 제단 초를 리모컨으로 켜는 걸 보고 빵 터졌다. 신부님은 이어 마이크를 끼고 미사를 보셨다. 미사 후 저녁을 먹기 위해 알베르게에서 추천한 식당으로 갔다. 어차피 메뉴판을 받아도 뭔지 잘 모르니 점원의 추천을 받았다. 가리비 요리와 생선 요리를 시켰다.


'와, 여기도 산티아고다.' 


너어어무 맛있었다. 솔직히 순례길을 걸은 지난 2개월 동안 어떤 음식을 먹어도 '괜찮네~'의 느낌을 받은 적은 있어도 '와 진짜 맛있다'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접시에 남은 소스까지 빵으로 싹싹 긁어먹었다. 디저트는 Flac 어쩌고 하는 걸 시켰는데 지금까지 먹었던 것과 차원이 다른 맛이었다. 행복했다.



Menu del Dia를 시키면 보통 음료도 포함되는데 물만 마시는 게 아까워서 오늘은 괜히 와인을 시켰다. 혼자인데 한 병을 다 줬다. 괜히 한 잔만 마시면 안 될 것 같아 두 잔을 마셨다. 몇 모금 맛본 것 빼고 여기 온 이후 처음으로 마시는 술이었다.





맛있게 저녁까지 먹고 나니 신이 나서 그냥 숙소에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 식당에서 무리 진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대화를 걸었다. 이들은 신기하게 생긴 기계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이 지역에서 유명한 사과주라고 한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그들은 '진짜? 거짓말? 진짜?'라며 무슨 유명 연예인을 만난 듯이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한국드라마 광팬이라며 자신이 재밌게 본 한국 드라마를 추천해 주기 시작했다. 한국드라마 하나로 우리는 금세 피를 나눈 형제가 되었는데 그들은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이 식당에서 자신을 찾으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기분 좋게 저녁시간을 보내고 숙소에 돌아오니 다들 잠자리에 누워있었다. 방의 한쪽 벽면이 모두 창이었는데 창문을 다 열려 있었다. 낮의 더운 날씨와는 다르게 스페인의 저녁은 쌀쌀했기에 조용히 열린 창문들을 닫았다. 한 호주 순례자가 다른 순례자를 가리키며 ‘저 친구가 열여 놓으래’라고 했다. 그래서 ‘몇 개만 닫아도 될까?’ 했더니 한숨을 푹 쉰다. 창문 몇 개를 닫으려고 하니 다른 순례자가 ‘Keep the windows open(열어 놔)’라고 말했다. 근데 그 말이 명령조여서 기분에 팍 상했다. 여기가 자기 방도 아니고, 'Is it okay?'도 아니고, 'Please'도 아닌 이 무례함은 뭐지?


’왜 이었는지 물어봐도 될까?‘라고 했더니 더워서란다. 그래서 ‘나는 밤공기 맞으면 잠 못 자는데 ‘라고 했더니 들은 채도 안 한다. 그들 무리가 과반수였기에 창문을 열어 둔 채로 침대에 누웠다. 오랜만에 마신 술과 발의 통증 때문도 있었지만 기분이 나빠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나중에 얼굴을 마주하면 할 말들을 되뇌다 잠에 들었다.


그들은 아침 6시 전부터 짐을 싸기 시작했는데 내가 아직 자든 말든 창문을 다 열고 큰 소리로 대화를 했다. 너무 짜증 나서 한국말로 ’와 매너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왔나 ‘라고 큰 소리로 말하고 침낭을 얼굴 끝까지 뒤집어쓰고 다시 잠에 들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도네이션의 진짜 의미. 자유가 주는 책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