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반백수 김한량 Jan 04. 2024

도네이션의 진짜 의미. 자유가 주는 책임

D+63 북쪽길 22일 차


✔️루트 : San Vicente de la Barquera - Pendueles(약 28km)

✔️걸은 시간 : 7시간 21분





이번 알베르게는 사실 호스텔에 가까웠다. 20명 넘는 사람이 한 방에서 잤다.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그런지 오늘은 나처럼 뭉그적 대며 준비하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 매일 다들 떠난 방에서 홀로 짐을 쌌기에 그들이 내심 반가웠다. 300m 채 가지 못 한 시점에 그중 한 사람과 길에서 마주쳤다. 걸음 속도가 비슷한 우리는 자연스럽게 함께 걷게 되었다. 영국에서 온 순례자였다. 그는 혼자 걸으면 조금은 더 빨리 걷는다고 했다. 나는 혼자 걸으면 조금 더 천천히 걷는다. 그런데 함께 걷는 속도가 둘 모두에게 편안했다.



오늘 길은 적당한 오르막길과 평지, 적당한 자연과 도로가 섞인 길이었다. 길이 좋아서인지, 코로나 후유증이 나아져인지, 체력 각성이 있었는지 오늘도 걷는 것이 수월했다. 걷는 것이 다시 즐거워졌다. 걷기에 지쳐갈 때쯤 음악을 들으며 걸었다. 영국 순례자는 ‘The Fall’이라는 80년대 영국 밴드 앨범을 소개해주었는데 행위 예술에 가까운 음악이었다.(보지는 못 했지만 목소리로 느낄 수 있었다.) 장기하와 얼굴들 노래를 많이 연상시키는 음악이었다. 



걷다가 잠시 쉬고 있는 순례자들
오늘의 집~~


도착한 알베르게는 바에서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1층은 바이고 2층은 알베르게였다. 예쁜 유리창으로 된 4인실에 이불도 넘 따듯하고 수건도 주고 매트리스도 좋았다. 3유로만 내면 세탁물을 세탁, 건조까지 해서 줬다. 저녁은 심플한 메뉴였지만 맛이 좋았다.



한 순례자가 Güemes 알베르게가 어땠냐 물었다. 알베르게에선 흔히 도네이션 알베르게라고 하면 많은 순례자들이 공짜로 묵을 수 있는 기회, 푼돈을 내고 묵을 수 있는 기회로 여겼기 때문에 '도네이션'의 의미에 대해 다시 고찰하기 위한 설명을 하는 시간을 가졌었다. 알베르게에서는 가격을 책정하는 자유와 그에 따르는 책임에 대해 강조를 했다. 순례자들이 직접 가격을 책정하는 자유를 갖는 대신, 식당에서는 한 끼에 20유로를 쓰면서 알베르게에 동전 몇 개를 던지고 가거나 아예 내지 않는 이들에게 도네이션의 의미와 책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른 순례자들은 이 시간이 마치 '돈 내놔'라는 소리로 들려서 불편했던 모양이다. 계속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떤 불편함이 올라왔는데 어떤 지점이었는지 명확하지 않아 한참 생각을 해야 했다. 


'그동안 돈을 많이 썼으니 오늘은 도네이션을 가야지!‘


나도 순례길 초반에 도네이션 알베르게를 저렴하게 묵을 수 있는 곳으로 인식했었다. 하지만 막상 가면 주인이 정성스럽게 식사를 차려주고 다음 가는 길에 대한 정보도 최대한 주려고 노력한다. 나중에는 이 시스템이 오히려 어렵게 느껴졌는데, 가격으로 책정하기 힘든 인간적 따듯함을 선물 받아 왔기 때문이다.(물론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결국은 일반 알베르게 보다 많은 비용을 지불하게 되어 왔다. 그럼에도 도네이션으로 가는 것을 선호하는 이유는 그들의 미소와 서비스가 내가 일정한 양의 돈을 지불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나의 지폐의 가치는 모두에게 일괄된 기준에서 결정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적은 예산으로 순례길을 걷는 학생의 10유로는 여유를 가지고 여행을 하는 중년층의 30유로보다 덜 값지다고 볼 수 없다. 나는 이 지점이 순례길에서만 만날 수 있는 낭만적인 문화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재정상태와 상관없이 걷는 이로서 동등하게 존중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가격이 책정된 제한된 서비스를 소비하는 수동적인 소비는 꼭 순례길이 아니어도 어디에서든 경험할 수 있다.


생각하보니 나의 소비 방식에 대해서도 깨달은 게 있다. 아마 기분파 소비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은데, 알베르게나 식당에서의 동전 몇 개 차이에는 손을 벌벌 떨면서 아름다운 공간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뮤지션에게 주는 지폐는 아깝지 않다. 책정된 가격은 의심 하면서 가격으로 책정하기 힘든 가치들에 대해선 후한 편이다. 결국은 돈을 아끼는 거에 비해 지출이 많은 편인데 지금까지는 이런 지출습관이 경제적으로 무능한 것 같아 부끄러웠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정서적 가치에 지출을 할줄 아는 사람이라고도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의 저녁~




기분 좋게 저녁을 먹은 후 잠 잘 준비를 했다. 깨끗하고 편한 침대에서 잘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눈을 감은 후 한참을 발바닥 통증 때문에 잠에 들 수 없었다. 진통제를 먹었지만 효과가 전혀 없다. 신기하게 발을 하늘을 향해 올리고 있으면 통증이 덜 하기에 베게 위치를 바꿔 벽에 발을 올리고 잠에 들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삐딱하게 걷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