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밭에서 참깨를 가지고 오셨다. 우리가 마트에서 깨를 사 먹을 때의 참깨 통에 잘 넣어진 그런 모습의 깨가 아니라 깨를 털어서 분리 해 낸 작업을 거친, 그러니까 아직 불순물을 까부르기 전 단계의 깨의 모습이었다.
오늘 아침 막 털은 깨를 충분히 말려야 하기에 크지 않은 쟁반에 깨를 와락 부었다. 그리고는 세상에 쓸데없고 몹쓸 것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깨 보다도 작은 벌레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작디작은 것들이 어떤 것들은 날아다니고, 어떤 것들은 최대한 빠르게 뽀로로 지나가고, 어떤 것들은 지렁이의 모습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작아 마치 기생충같이 생긴 것들로 보였다.
난 이 벌레들을 최대한 빠르게 죽여야 했다. 뉴스에서 보았듯 물리면 약도 없는 살인 야생 진드기들은 빠르게 사람 몸에 침투해 잠복기를 거쳐 사람의 혈소판을 감소시켜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개미도 있었고 실지렁이나 날벌레도 있었지만 진드기가 제일 무서웠다.
미안, 내가 살려면 너를 죽여야 해
손가락으로 그 작은 것들을 꾹꾹 눌러 죽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그사람들이 가진 생각이 어쩌면 이런 논리였을까?
갑질 천국 한국
'미안, 내가 살려면 네가 죽어야 해.'
먹이사슬로 얽힌 정글처럼 이 사회에도 자신이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짓밟는 사람들이 있다.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그 작디작은 벌레들을 꾹꾹 누르듯 누군가 '내가 너 보다 위에 있고 너는 밟혀야 해'라는 생각을 담아 말과 행동으로 나를 꾹꾹 누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갑/을 관계의 이해관계가 계약서로 얽혀있는 혹은 예정인 곳에서 주로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
온갖 감언이설로 나를 꾀어 무슨 혜택이듯 다 가질 수 있을 듯 말하며 어느 직책에 앉혀 놓았다가 계약서에 도장을 꽉 찍는 순간 계약의 갑의 입장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했던 모든 말이 거짓이었음을 확인시켜 준 일도 있었다.
아직 세상은 살만하다지만 여전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기를 치며 살아간다. 어떤 사람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부분이 거짓인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사기를 당하지 않기 위해 먼저 사기를 치기도 한다. 나에겐 논리적이지 않은 일이 상당수의 어떤 사람들에겐 '남들도 다 그렇게 살아'라는 말로 합리화를 하며 당연한 일상으로 받아들인다.
다른 사람을 일부러 깔아뭉개는 일, 일명 후려치기라고도 한다. 한 예로 결혼을 앞둔 여자들은 이런 일을 보통 예비 시부모님, 특히 예비 시어머니에게서 많이 당한다. 상견례가 끝나고 결혼 직전 심지어 신혼 생활을 누리고 있을 때까지도 어쩌면 결혼 생활 내내 당하기도 한다. 남자들은 절대 모른다. 자신이 아는 우리 엄마와 네가 말하는 우리 엄마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 그래서 이런 말을 제일 많이 할지도 모른다.
우리 엄마는 안 그래
응, 너네 엄만 안 그래.
근데 내 시어머니 될 분이 그래
후려치기 - 나를 가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
요지는 당신의 성별이 무엇이든 상대방이 내 자존감을 뭉개버리는 사람 앞에서 참지 않아야 한다. 난 그동안 쓸데없이 후려치기를 참 많이 당했다. 회사에서, 그 외 계약서로 얽힌 이해관계가 있는 상황 속에서, 가족 관계에서도....
이 글을 읽고 있는 어떤 분들에게는 그 상대방이 회사 상사가 될 수 있고, 배우자, 혹은 부모가 될 수도 있고, 학교 선배, 친구, 당신이 문제라고 말하며 마음이 아픈 내담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담사 등이 있다. 누구라도 자신을 가치 없는 사람으로 만든다면 당신의 행복할 삶을 위해서 하루라도 빨리 그 상황에서 벗어나시길 바란다.
갑질, 진상, 꼰대, 사기꾼들이 유난히 다른 나라보다 이 나라에 많이 있는 이유는 한국에서 잘못 정의된 유교 문화에서 비롯되었다. 본래의 유교 문화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양심과 인격을 존중하는 것인데 현재의 한국은 아직도 변질된 유교의 영향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선진국의 차(vehicle)들과 다르게 우리나라의 차들은 사람 앞에서 절대 멈추지 않는다. 한국의 차는 사람보다 늘 먼저 간다. 사람을 우선으로 하는(인간을 존중하는) 이 훌륭한 에티켓이 한국에서 지켜지지 못하는 이유가 늘 궁금했다. 나는 이것의 이유를 자신들 스스로 정한 레벨의 차이를 미리 정해두어서라고 믿는다. '나는 차가 있고 차도 없는 너는 걷고 있어'와 같은 마치 스스로를 다른 분류의 사람인 양 레벨을 정해버린 서열의 사회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조선시대의 왕이나 사대부들이 가진 권력으로 인해 누군가 지체 높은 분의 가마가 지나가면 서민들은 가던 길도 멈춰 서야 했다. 그 멈춤에는 암묵적인 생각 즉, 나는 너희들과 다른 계급의 사람이라는 의식이 전제되어있다. 이 사실은 정말 안타깝게도 양반과 상놈의 구분이 사라진 현대의 사람들에게도 적용되고 있다. 그래서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사람을 우선으로 하는 그 에티켓을 아직도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느낀다. '내가 먼저 가야 해요'는 삐뽀삐뽀 자동차들(구급차, 경찰차, 소방차)만 먼저 가도록 하는 것이 어떨까? (+의료 헬리콥터)
그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혹은 이미 버렸어야 할 갑질 DNA를 아직도 가지고 있는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성별, 인종, 종교, 피부색 색이 다른 누군가에게 '너 따위가 어디 감히 나에게'라는 말과 행동이 나오면 진상과 꼰대가 되는 것이고 자신이 가진 권력으로 상대방에게 온갖 거짓으로 꾀어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바라면 그런 사람이 사기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텔레마케터나, 항공 서비스직, 식당 및 카페 종업원 등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감정노동 피로도가 계속 올라가고 있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은 문명국가에서 태어났다는 가정 하에 우리는 책을 읽고 지식을 쌓는다. 지식 안에는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서든 짐승과 달리 인간답게 서로를 감싸며 보듬어 주길 인문학으로부터 배운다. 특히 출판업에 종사하는 책을 다루는 사람이며 당신이 지식인이라면 더더욱. 어쩌면 적어도 갑질이나 진상이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그런 사람이 되지 않도록 많은 책들이 당신에게 이미 알려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차가 있으나 없으나 차에 타고 있는 상대와 걷고 있는 당신은 인간으로서 동급이다. 작가들과 출판사도 동급이다. 오히려 출판 계약할 때 작가가 늘 '갑'임을 잊지 않길 바란다. 상견례를 할 때도 양가는 동급이다. 면접 볼 때의 면접관과 면접자도 동급이다. 상대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봐야 하지만 나 또한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을 면접 본다는 마음으로 면접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혹은 회사)은 내가 선택한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선택해 온 길이 내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고 어떤 삶으로 가고 싶은지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야생으로부터 온 거친 깨가 불순물을 제거하고 고소한 깨로 거듭나듯 당신의 인생에 깨소금 볶는 날들이 더 많아 지기를 바란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 모두 가치 있는 사람이다. 누군가에게 찍혀 눌림을 당하고 살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