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완.

by 시기화


그녀는 접이식 의자를 신중히 이리저리 옮겼다. 그러고 나서 이젤 앞에서 다리를 굽히며 각도를 보더니 마음에 들었는지 앉아도 된다고 손짓했다. 나는 그곳에 앉아 홍 연지에게 우측 옆모습이 보이도록 자리를 잡았다. 이윽고 홍연지는 연필을 들어 길이를 잰 뒤 천천히 그리기 시작했다. 종이에 연필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듣기 좋은 소리였다. 그렇지만 나는 왜 이곳에서 이러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이건 쇠도끼로 커다란 박을 냅다 내리쳐서 둘로 쪼개도 나오지 않을 수수께끼였다. 나는 뭘 하고 있는 거지.

"움직이면 안 돼요. 조금만 참아요."하고 홍 연지가 말했다. 나는 그대로 멈춰서 맞은편에 보이는 철제문 구석에 있는 어슴푸레한 경계선을 보며 언젠가 보았던 겹겹이 산이 드리워진 풍경이 떠올랐다. 그것은 기억 속에서 남아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널브러진 잔재 같은 거였다. 좌석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버스를 타고 피곤에 지쳐서 우두커니 서있는데 온몸을 감싸는 따뜻한 노을빛에 창밖을 봤는데 멀리서 보이는 산이 옛날 수묵화의 한 장면처럼 하늘과 동화돼 있는 진경.

"연준 씨 일은 언제 쉬어요?" 홍연지가 물었다.

"한 달에 두세 번 쉬어요."

"쉬는 날에는 주로 뭐 하세요?" 김수리가 물었다.

"요즘은 그냥 집에서 있어요. 텔레비전을 켜두고 때가 되면 밥을 먹고… 시시하죠?"

"다 그렇게 사는 거죠." 수리가 말했다.

"주로 몇 시까지 있어요? 작업실에" 내가 물었다.

"마음 가는 대로 있다가 들어가요. 잘 때도 있고 밤샐 때도 있고 어느 날은 시간 가는지 모르고 그리다가 집에 가야지 하고 일어났다가 마무리는 하고 가자. 하고 다시 앉은 적도 있어요. 옆에 있는 연지도 똑같이요."

나는 생긋 웃었다. 슬쩍 손목시계를 보니 오후 여덟 시 오십 분을 지나고 있었다.

"대충 뼈대가 완성 됐네요."

나는 홍연지의 옆으로 가서 크로키된 그림을 보고 잘 그렸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이제 집으로 가봐야겠다고 덧붙였다.

작업실을 나오고 나서 곧바로 <플랜 B> 카페로 가 레몬크림 케이크를 포장해서 집으로 가져왔다. 포장하는 직원에게 초가 있냐고 물어보자 머뭇거리다가 초 한 개를 같이 넣어준 그 케이크를.

옷을 갈아입고 냉장고에서 병에 든 사과주스를 가져와 케이크 케이스를 열어 초를 꽂고 성냥으로 불을 켰다. 한동안 일렁이는 초를 보다가 입으로 가볍게 불고 포크로 떠먹었다. 먹는 도중에 지난번 읽다 말았던 재혁이의 쪽지를 가져와 천천히 열었다.



/나는 그것을 까마귀의 저주로 부르기로 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겼는가에 대해 끝없는 의문을 제시해도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그건 누군가에 의해서 옮겨졌거나 어쩌면 나도 그것을 누군가에게 옮길지 모른다.

매일 어둠이 깔리면 아무도 모르게 까마귀의 저주가 시작된다. 나뭇가지 위에 앉아 나를 노려보며 그날로 데려가 내게서 무언가를 추출해 간다.


[추출?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잠을 자고 꿈을 꾸는 게 두렵다.

이것은 교활하게 행복한 순간에 찾아와 내게 잊지 말라고 경고하고 떠난다./


적혀있는 종이를 뒤로 넘기자. 재혁이 동생에게 쓴 편지와 함께 끝이 났다. 나는 종이를 유리병 안에 넣어두고 냉장고 안에서 맥주를 꺼내와 마셨다.

레몬크림 케이크는 반쯤 남겨져 기포를 일으키며 녹아내리고 있었다. 나는 옆에 놔두었던 플라스틱 케이스를 씌워두었다. 눈을 깜빡거리는 동안에 눈물이 맺혔다. 두 손은 캔맥주를 움켜쥐고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캔에 비비면서 울었다. 나는 왜 몰랐던 것일까. 나 자신이 미워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나는 재혁이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 것이다. 아무런 짐도 덜어내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쓸모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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