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주파수를 이리저리 맞췄다.
멈춘 곳에서 레몬에 관한 사연이 흘러나왔지만 듣다가 싫증이 나서 다이얼을 돌려 음악만 나오는 채널로 틀어놓았다. 그 채널에서는 일하는 내내 팝송이 꾸준히 연이어서 나왔다. 아는 곡이 나오면 음을 맞춰서 혀를 튕기며 책 정리를 했다.
지금 시간은 오후 두 시 십분. 요 며칠간 이 시간만 되면 정해진 것처럼 세 명의 손님이 책장을 훑고 있었다.
그렇다고 매번 같은 사람이 아니라 처음 보는 사람들이 와서 책을 펼쳐서 읽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 가을이 돼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아닌 게 아니라 가을이 되고 나서 정말 손님이 30%는 늘었다. 흔히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학교에서나 미디어에서 떠들어 댔던 탓에 무의식적으로 헌책방에 발을 들여놓게 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잠시 라디오 소리를 낮추고 책 페이지가 하나둘씩 넘겨지는 소리를 눈을 감고 경청했다. 종이가 스치는 소리는 하나둘씩 떨어지는 낙엽을 떠올리게 했다. 걷기만 해도 사각사각 소리를 낼 정도로 낙엽이 길거리에 가득한 거리. 그리고 그 거리를 같이 걷던 재혁이가 떠올랐다. 나는 아직까지도 재혁이가 저 멀리 북극곰을 만나러 긴 여행을 떠났다고 생각했다. 그의 죽음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홀로그램의 한 종류처럼 고개를 돌리면 저 멀리서 손을 흔들고 있는 재혁이의 모습이 잔상으로 남았다.
펼쳐져 있던 책이 닫히는 냉정한 소리에 짧은 사색을 멈추고 라디오를 볼륨을 살짝 올렸다. 그리고 책 덮는 소리의 근원으로 보이는 한 남성을 주시했다.
그는 백팔십에 약간 못 미쳐 보였다. 갈색 구두를 신고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검은 백팩을 메고 요리책을 유심히 읽고 있었다. 해산물 편이라고 적힌 요리책을 얼마간 보더니 마음에 들었는지 겨드랑이에 낀 채로 다른 책을 찾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는 땅 위에 대충 세워둔 책 더미를 살펴보더니 중간에 있는 책을 꺼냈다. 그러고 나서 제목을 보고 손가락으로 빠르게 펼쳐보더니 툭툭 겉표지를 치댔다. 얼마 안 있어서 그는 더 마음에 드는 게 없었는지 계산대에 와서 값을 지불하고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망설이더니 말했다.
"연지 알아요?"
"연지요?" 나는 알 수 없었다.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를 보며 생긋 웃더니 마저 말했다.
"미술강사요. 홍연지 그 친구가 시간 되면 가보라고, 값도 싸고 분위기도 좋다고 해서 한번 와 봤어요."
문득 며칠 전 명함을 건넸던 미술강사가 떠올라 고개를 끄덕였다.
"컬러를 습관처럼 말씀하시는 분이요? 분위기는 잘 모르겠지만 값은 저렴해요."
"값은 정말 싸네요. 자주 오게 될 것 같아요. 그리고 분위기도 마음에 들어요. 서점에 들어가면 특유의 공기 냄새가 있거든요. 새 책 냄새라고 해야 하나, 종이 냄새라고 해야 하나. 여기는 그런 게 없어서 좋아요. 비밀공간 같은 느낌도 나고 물론 헌책냄새가 나긴 하지만 그건 그거대로 좋네요."
그는 검은 백팩을 가슴 쪽으로 향하게 한 뒤 두 권의 책을 담고 백팩을 다시 뒤쪽으로 돌렸다.
"친구분도 같은 직장을 다니시는 거예요?" 내가 물었다. "아니요. 작업실만 같이 쓰고 있어요. 비용이 부담 돼서 반반씩 내면서 유지하고 있거든요. 주로 작품이 시작되면 아무 말 없…"
그가 말하고 있는 도중에 손님이 다섯 권의 책을 가져와 카운터에 올려두었다. 나는 빠르게 계산하고 봉투에 담아 건네주었다. 검은 백팩 남은 어색하게 생긋 웃으며 "시간이 애매해서 저도 가봐야겠네요." 하고 말하더니 손을 들어 인사하고 앞서간 손님을 뒤따라 사라졌다.
'하던 대화는 끝내고 가지'라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저으며 주머니 속을 뒤적거렸다. 구겨진 명함이 그대로 있었다. 펼쳐서 보니 위쪽에 화가 홍연지라고 적혀있고 강습 문의는 휴대폰 번호로 연락 주세요.라고 적혀있고 밑에 작업실 주소가 적혀있었다.
'꽤나 심플한 디자인이군' 나는 명함을 펴서 가방 안에 있는 다이어리에 꽂아두었다. 그러고 나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을 들으며 책표지에 붙은 테이프 조각을 조심스럽게 처리했다. 역시 계절 탓인지 테이프를 떼어내는 과정 중간중간에 계산을 해야 하는 일이 확연하게 늘었다.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잡일을 하는 도중에 계산을 원하는 손님이 한두 명으로 기억될 정도로 적었다. 세상은 계절이 바뀜으로 인해 많은 것들이 바뀌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다람쥐는 도토리나 밤을 모을 테고 은행잎은 색이 변해서 땅에 떨어질 테고 나 역시 내가 느끼지 못한 어딘가가 누렇게 변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가슴 한편이 쑤셨다.
나는 퇴근하고 나서 근처 채소가게에 들러 표고버섯과 양송이버섯 그리고 오이, 양배추도 샀다.
장본 것을 들고 집에 들어오니 쌀쌀한 기운이 느껴졌다. 왜 그런가 하고 봤더니 아침에 베란다 문을 열고 출근한 게 원인이었다. 나는 곧바로 베란다 문을 닫았다. 보일러를 틀어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먼저 쌀을 안칠 걸 후회하고 쌀을 씻어서 전기밥솥에 넣어 취사 버튼을 눌렀다.
취사가 완료될 동안 반으로 자른 양배추와 오이를 식초물에 담가두었다. 표고버섯과 양송이버섯은 밑동을 잘라내고 칼로 얇게 썬 뒤에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볶다가 물에서 건져낸 양배추를 헹군 뒤 잘게 잘라 같이 볶았다. 간장으로 마무리 한 채소 볶음을 접시에 담고 시간에 맞춰서 갓 지은 밥과 곁들여 먹었다. 다 먹고 나서 설거지를 끝내고 가방을 열어 다이어리에 꽂힌 명함을 찾았다. 구겨져있었던 명함이란 걸 알 수 있을 만큼 단면이 불균형적인 사선으로 자국이 나있었다.
나는 홍연지라는 이름을 읽고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여덟 시 사십 분을 지나고 있었다. 나는 식탁 옆에 놓여있는 휴대폰을 들어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연결음이 두세 번 지나자 휴대폰 너머로 ‘여보세요? 누구시죠.’ 하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게 긴장이 됐다. "아, 안녕하세요. 헌책방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녀는 반갑게 인사를 하고 웃으며 자기 작업실에 언제 들릴 거냐고 물었다. 나는 쉬는 날 가보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하고 말했다.
"낮에는 제가 없을 수 있어요. 수업 때문에. 퇴근하시고 피곤하지 않으시면 들려주세요. 저녁시간대에 작품 활동을 하거든요. 물론 지금도 작업실이지만요." 하며 웃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저 오늘 가게에 친구분이 왔다 가셨어요. 좋게 말해줘서 감사해요. 그럼 퇴근하고 나서 한번 들릴게요." 나는 종료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옆에 놓아두었다. 갑작스럽게 심한 갈증을 느껴 페트병에 든 생수를 컵에 두 번 따라 마셨다. 그러고 나서 리모컨으로 텔레비전 채널을 천천히 돌렸다. 도중에 영화 식스센스를 발견하고 볼륨 버튼을 눌러 두 단계 올리고 텔레비전 화면을 쳐다보았다. 정말이지 식스센스 아역 배우는 극 중 역할을 맡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연기를 했다. 흠잡을 수없이 완벽한 연기로 나의 외로움이 배가 될 지경이었다. 혼자서만 귀신을 본다는 사실은 아무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괴롭지 않은가. 예전에 식스센스가 전염병적으로 학교나 학원을 가도 빠지는 일 없이 입에서 오르락내리락거릴 때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본 기억이 낫지만 다시 봐도 내용이 선 듯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막바지 반전 부분만 머릿속에서 떠오를 뿐이었다. 결국 그 반전대로 그것은 끝이 났다. 그 장면만큼은 어릴 때 기억과 일치했다. 나는 담요를 가져와서 거실 불을 끄고 베란다에 비치는 달을 쳐다보았다. 실로 아름다운 모양의 보름달이었다.
똑딱똑딱 탁자 위에 놓인 시곗바늘 소리가 귀에서 맴돌았다. [삶은 낮 하늘의 달처럼 외롭고 슬픈 거야.]
[밤하늘의 달처럼 이겠지.] [아니, 지금 낮. 하늘의 달처럼. 저기 봐. 달은 존재하는데 눈에 띄지 않다는 이유로 아무도 신경 쓰지 않잖아. 우리의 삶도 같아. 내면이 보이지 않을 뿐 어쨌든 존재하거든] 어디서 누구에게 들었더라…. 나는 고개를 기울이고 달빛을 받는 석상처럼 가만히 있었다. 루비도 상처를 받았겠지? 잘 지내고 있으려나…. 나는 그대로 스러지듯 누워 잠을 기다렸다.
이튿날 일을 마치고 명함 뒤편에 심플하게 그려져 있는 지도를 따라 홍연지의 작업실을 찾아갔다.
나는 들어가기 전에 중요한 시험이라도 앞둔 듯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철제문을 두들겼다. 이윽고 물감이 발린 청색 공방 앞치마를 입은 그녀가 문 뒤로 나와 반겨주었다. 모습이 꽃잎 뒤에서 빼꼼 얼굴만 내민 요정 같았다. 작업실 문틈 사이에서 물감 냄새가 흘러나왔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 코를 움켜쥐었다.
"오시기 전에 미리 전화 줘서 고마워요. 물감 냄새가 지독하죠?"그녀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아직 코가 적응을 못해서 그래요. 혹여나 미연에 방지로 전화를 했지요.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라라는 속담을 좋아해서요."
그녀는 어딘가에서 접이식 의자를 가져오더니 내 앞에 가져와서는 조심스럽게 폈다. 오랫동안 펴지 않았는지 마디에서 뻑뻑한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앉으라며 오른 손바닥을 편채로 접이식 의자를 가리켰지만 나는 생긋 웃으며 벽에 걸려있는 작품부터 보고요.라고 말했다.
"편히 작업하세요.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녀에게 안심시키듯 한 번 더 말하자 그녀는 이젤 앞에 앉아 붓을 물통에 넣고 몇 번이고 흔들어 댔다.
천천히 한 바퀴 둘러보고 와서 접이식 의자에 앉아 있자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편에서 작은 병에 든 오렌지 주스를 들고 와 건네주었다.
"곧 공동 작업실 관리자가 올 시간이네요."
"그때 헌책방에서 뵀던 분이요?" 나는 오렌지 주스 병뚜껑을 열고나서 잊어버렸다는 듯 다시 뚜껑을 닫고 흔들며 말했다.
"맞아요."그녀가 앉은 곳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이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은 그 친구의 영역이에요. 이쪽은 제 영역"
"온탕과 냉탕 비슷한 건가요?"
"뭐, 그렇다고 해두죠."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낯빛이 광이 첨가된 올리브색 같은 느낌이 나네요. 고결해 보여요."
나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창피해요. 고결과는 거리가 멀지만 고마워요."
"사실 제 작업실에 와달라고 한 이유가 있어요."그녀가 붓을 내려놓으며 이젤을 비스듬히 치우며 말했다.
그러자 차갑던 철제문을 열고 전에 만났던 베이지 트렌치코트 남이 화구통을 맨 채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나를 보더니 반갑게 인사를 했다. 나도 웃으며 손을 살짝 흔들었다.
인사가 끝나자 그는 화구 통과 검은 백팩을 내려놓더니 아까는 보지 못했던 천으로 가려진 공간으로 들어가 작업복으로 보이는 옷과 공방 앞치마를 입고 나왔다. 그러고 나서 뒤편에 있는 캔버스를 들고 와 이젤에 얹어두었다. 그 모든 게 불과 5분도 채 안 돼서 일어났다는 사실에 나는 훈련이 잘 된 동물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작업실이 꽤 넓네요."내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다 저분 덕에 실제 시세보다 싼 가격으로 쓰고 있어요." 홍 연지가 말했다.
"연줄이 있어서요."트렌치코트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연줄?" 내가 되물었다.
"알면 다쳐요. 아직까지는 비밀."이라고 트렌치코트가 말했다.
"그런데 배고프지 않아요?"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 저녁을 챙겨 먹는 나로서는 지금 시간에 맞춰 뱃속에 검은 구멍이라도 뚫린 듯 공복감이 찾아왔다.
"마침 저도 배고팠어요. 수리 너는? 저녁 안 먹었지?" 그녀가 트렌치코트에게 물었다.
"나도 배고파."
"드시고 싶은 거 있어요?"그녀가 물었다.
나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사실 아까부터 짜장면이 먹고 싶었어요.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곳을 둘러보는 내내 생각났어요."
"짜장면 좋아요." 홍연지가 말했다. "나도. 좋아." 수리로 불린 트렌치코트 남자가 이어 말했다. 우리 셋은 그렇게 해서 짜장면을 시켰다. 배달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도착했다. 트렌치코트가 짜장면을 먹으며 물었다. "그런데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저는 김수리예요."
"저는 박연준이에요." 나는 손바닥을 위로 보이며 손끝은 홍연지를 가리키며 마저 말했다. "그리고 홍 연지님 맞으시죠?"
"네 맞아요. 같은 연자가 들어가네요." 홍연지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의자에 앉아 있는데 연지가 말했다.
"연준 씨 옆모습을 그리고 싶어요. 아까 수리가 들어오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쳤던 말이에요."
"제 옆모습요?" 몇 년 전 재혁이가 내게 해줬던 말이 성냥개비에 불붙듯이 떠올랐다. 그때의 재혁이도 내게 옆모습이 균형이 잘 잡혀있다고 해줬다. 그리고 석고상으로 만들고 싶다고….
"네. 옆모습요. 연준 씨 옆모습은 스틸 블루 같은 느낌이 있어요. 색, 컬러를 보는 사람은 올리브드래브나 다크 올리브그린으로 보겠지만 연준 씨는 스틸 블루가 옆모습에 묻어 나와요."
김수리가 이젤에서 빼꼼 얼굴만 내밀고 말했다.
"생소하게 들리겠지만 사람마다 내뿜는 컬러감이 있어요. 연지는 그걸 말하고 있는 거예요. 더 말하자면 저는 다크 오렌지 연지는 퍼플 계열에 다크 오치드에 가까워요." 수리는 뭔가 생각난 듯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다시 한번 천으로 가려진 비밀공간으로 들어가 가을의 까마귀 떼를 내쫓는 소고 소리를 연상시키며 뒤적거렸다. 그는 얼마 안 있어 천을 들추며 한 손에 책을 들고 나왔는데 그는 그 책의 페이지를 넘기며 몇 번 훑더니 찾았는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다크 오렌지 그리고 이건 다크 오치드 마지막으로 스틸 블루 어때요? 신기하게 납득이 되죠?"
"그러네요."나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마저 말했다.
"그려주세요. 연지씨가 그려준 제 모습 보고 싶어요."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금방이에요." 하고 홍 연지가 말하면서 생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