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by 시기화

팝콘의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 몇 개월이 흘렀다.

하늘에는 언제나 그렇듯 구름이 떠 있었다. 그리고 태양도 함께 빛나고 있었다. 나는 몇 개월 전 팝콘의 장례식장에서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말라버린 나뭇가지처럼 아니, 타다가 만 나뭇가지처럼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내 안에 어딘가가 깊게 훼손돼 있었다. 그게 눈물샘인지 아니면 심장 속 깊은 방안의 작은 새가 날아간 탓인지 알 수 없었다. 무엇이 됐건 그건 영원히 온전한 모습을 갖추지 못한 채로 세월이 지나도 그대로 있을 것이다.

나는 헌책방 카운터에 앉아 어두컴컴한 구석을 응시했다. 책이 그늘에 가려진 사각지대였다. 왠지 감정이 북받쳐올라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그것은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나는 눈을 감고 나서 연준아, 그러지 마 괜찮아. 라며 내 이름을 부르며 다독거리며 눈을 손으로 훔쳤다. 오른손을 이마에 대고 쓸어내리자 낯익은 손님이 들어왔다.

그녀는 몇 개월 전 비 내리는 날에 본 하이힐을 신은 여성이었다. 아래쪽을 보자 이번에도 블랙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그녀는 보라색 클러치 백을 살짝 들어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책장으로 가서 훑기 시작했다. 나는 카운터 앞에서 휴지를 뽑아 눈가를 닦았다. 얼마 안 있어 그녀는 동화책 세 권을 가져와서 계산했다.

"분위기가 바뀐 것 같아요. 전체적으로" 그녀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분위기요? 어떻게 바뀐 것 같아요?" 나는 미소 지으며 물었다.

"가을과 어울려진 것 같아요. 기분 탓이겠지만 그때는 라운 그린 컬러였다면 지금은 새들 브라운? 아, 미안해요. 제가 미술강사라서 컬러로 표현할 때가 있어요. 퍼츠샤. 차트리우스. 게인스보로 같은" 하며 생긋 웃었다.

"전에 무슨 스보로 얘길 하셨던 기억이 얼핏 나는데 작가 이름이 아니었나 봐요? 사실 그런 작가가 있던가? 하고 속으로 몇 초 정도 생각했어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게인스보로. 회색 계열의 색이름이죠. 안 그래도 그때 오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놔뒀어요. 종종 오해받아서 때마다 설명하기도 귀찮고 일종의 직업병이랄까요. 아이들이 쉽게 익힐 수 있도록 컬러로 표현하는 거죠. 실제로 본인도 모르게 외우게 되는 학습효과도 있더라고요. 웃기지만"

"완전히 착각하고 말았네요. 어린 왕자는 재밌게 읽으셨나요?" 나는 종이봉투에 동화책을 넣으며 말했다.

"기억력이 좋은 편이네요. 결말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볼만한 책이더군요. 그리고 그날 잘 포장해 준 덕분에 고맙게도 단 한 방울의 물방울도 들어가지 않았어요."

나는 생긋 웃으며 종이봉투를 건넸다.

"다행이네요. 기억력이 좋은 편인 것도 있지만 그때 기억에 남는 게 있었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책이 어린 왕자이기도 하고 하이힐도 각인돼 있었어요."

"하이힐요?" 그녀가 물었다.

"맞아요. 비 오는 날 하이힐. 꽤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안 그래도 그날 학생들의 시선을 느꼈어요. 한 아이는 선생님 비 오는데 그거 신고 온 거예요?라고 말하더군요. 스타킹은 젖어서 벗어버리고 맨발로 하이힐을 신고 사과를 그리는 강의를 하면서. 제가 생각해도 어이없어서 웃음이 났지만" 그녀는 생긋 웃으며 마저 말했다. "때로는 마구잡이로 걷고 싶다거나 비를 무진장 맞아도 상관없다는 마음이 생기잖아요. 감기에 걸리든 말든 뭐, 저는 날씨를 생각 안 하고 하이힐을 신고 문을 나섰을 때 우중충한 하늘에 우산만 들고 와버린 본의 아니게 일어난 일이지만 그때 그래, 비가 와도 상관없어. 그런 기분이 들었어요."

그녀는 책을 담은 종이 가방 손잡이를 잡아들고는 "시간 괜찮으시면 제 작업실에 언제 한번 오세요. 전시해 둔 작품들도 잔뜩 있어요." 하며 보라색 클러치 백에서 명함케이스를 꺼내어 뒤적거리며 명함을 건네고 짧게 인사를 하며 나갔다. 나는 그녀에게 미소로 답했다. 그러고 나서 받은 명함을 주머니 속에 넣었다.

퇴근을 하고 거리를 잠깐 걸었다. 기분 좋은 바람이 머리칼을 스쳤다. 얼마간 걷고 나서 집으로 들어가 형광등도 켜지 않고 가방을 내려놓았다.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 창밖으로 비치는 가로등 빛을 보며 재혁이를 떠올렸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 불을 켰다. 텔레비전을 켜고 방으로 들어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부엌으로 가서 물을 마셨다. 그러고 나서 냉장고 안에 들어있는 브로콜리를 칼로 자른 다음 데치고 나서 소금과 참기름으로 버무려 가져왔다.

나는 포크로 그것을 찍어 먹었다. 텔레비전 속에서는 시답잖은 남자가 누군가에게 쫓기는 장면이 나왔다. 곧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울부짖다가 예상대로 총에 맞고 죽었다. 나는 리모컨을 들어 전원 버튼을 누르고 브로콜리를 마저 먹었다. 먹는 와중에도 재혁이가 계속해서 떠올랐다. 공허한 공간에서 오직 입안에서 코끼리가 당근을 씹어 먹는 소리가 났다. 나는 다 먹어치우고 접시를 싱크대에 가져다 놓았다. 거실로 가는 길에 발에 무언가가 차여서 보니 부엌 구석 트레이 위에 언제 있었는지 모르는 종이가방과 검은 봉투가 숨죽인 검은 고양이처럼 놓여있었다. 종이가방을 뒤로한 채 자리에 앉으려다 구석에 있던 그것 안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해서 가져와서 열었다. 안에는 후드티와 소라 껍데기가 들어있는 유리병이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 사건이 일어나기 하루 전날 팝콘이 카운터에 맡겼던 물건을 부엌에 놔두고 급류에 휩쓸리듯 잊어버린 게 떠올랐다.

나는 후드티를 들어 코에 대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재혁이의 냄새가 났다. 그러고 나서 유리병뚜껑을 열었다. 소라 껍데기를 꺼내기 위해 손을 아래에 받치고 조심스럽게 툭툭 쳐서 내용물을 꺼냈다. 몇 겹으로 접힌 종이와 소라 껍데기가 나왔다. 나는 그것을 귀에 갖다 대어 눈을 감고 안에서 나오는 기묘한 소리를 몇 번이고 들었다. 소라껍데기가 간직하고 있는 파동을 재혁이도 몇 번이나 들었을 생각을 하니 어딘가 모르게 슬픈 음악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그것을 잠시 옆에 놔두고 종이를 열어 읽기 시작했다.



/ 몇 년이나 지난날에 글을 써 내려간다.

그날 나는 꿈속에서 커다란 달을 등지고 있는 커다란 나무 위에서 까마귀 한 마리가 무언가를 쪼아 먹는 장면을 보았다.

그것이 쪼고 있는 게 숲에서 잡아온 들짐승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다. 발톱으로 짓누르며 부리로 쪼아리며 기다랗게 늘어지는 살점이 그림자로 보일 뿐이었다.

나는 창밖에서 인기척을 숨긴 채 그것을 보고 있었다.

그것이 까마귀라는 걸 알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만 커다랗게 돋보기로 보듯이 확대되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까마귀는 내가 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끊임없이 살점을 집요하게 쪼아 먹었다. 나 또한 그대로 창문에 기대어 숨죽인 채로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문득 자기 전 닫아두었던 창문이 열려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왠지 모르게 고개를 돌려 침대를 봤을 때 동생이 사라져 있었다. 목뒤에서 피가 거꾸로 쏟아 오르는 느낌을 받고서 잠에서 깨어나 눈을 비비며 숨을 고르며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동생을 보며 안심했지만 그날은 평소와는 다른 날처럼 느껴졌다.

마치 붕 떠있는 헬륨 풍선을 묶어두고 있는 끈이 금방이라도 풀려 날아갈 것처럼 어딘가 모르게 불안한 감정이 들었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불길한 예감은 딱 들어맞았다. 그날 나는 동생을 잃었다.

인도에서 서로 나란히 걷다가 도로와 인도의 경계를 걸쳐서 걷던 내 동생을 차가 들이받아 붕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주변 사람들이 몰려오고 사이렌 소리와 귓속에서 이명이 울리고.

매일 밤 그 장면만 꿈속에서 느릿하게 반복되어 보일뿐이다. 마치 저주처럼.

나는 그날로부터 저주받았다. 물을 천천히 흡수시키는 휴지 조각처럼 나는 어둠 속으로 침식되고 있다. 어둠이 내리면 심장 속 깊은 어딘가에서 혈관 구석구석으로 무언가를 옮겨서. 나를 어떤 것으로 물들게 만든다.



나는 멈춰서 그대로 종이를 접고 손가락으로 미간을 눌러 눈을 감고 있었다. 단순히 읽는 것만으로도 내 안의 어딘가가 상실된다고 느꼈다. 지독한 고독감이 파고들었다. 기억은 퇴행이라도 하듯 검게 그을린 그날. 장례식장에서 날 세워 그었던 그 장면으로 나를 데려다 놓았다.

그날 그녀는 어두컴컴한 계단 한구석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나는 루비를 보며 사고에 대해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녀는 재혁이가 약속 장소에서 기차 시간이 지나도록 오지 않아 벤치에 앉아있다가 뒤늦게 연락을 받고 알았다고 말했다. 나는 울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미안해. 나 오늘 이후로 널 못 보겠어. 네가 미워서가 아니야 그런데 마음이 그래. 흔히 영화 같은 걸 보면 죽은 친구를 회상하며 술 한잔하면서 얘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오던데 나는 그렇게 못할 것 같아. 그런 상황 자체도 싫어. 아니야. 그래. 실은 네가 싫었어. 네 모든 게 싫었어. 너도 날 미워해. 날 싫어해. 그리고 다신 보지 말자 우리. 다신 보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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