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는 23시간이다. 달콩이 첫가을운동회가 있는 날이라 1시간 조퇴를 했기 때문이다. 학부모 선서 대표를 맡아 일찍 간 것도 있다. 500여 명이 참석한다고 해서 많이 부담되었지만 언제 또 이런 걸 해보겠나 싶어 흔쾌히 응했다.
엄마 대표가 빠져 대타로 오신 왼쪽 분
토요일 13:00,
점심시간이 다 되었을 즈음 서둘러 짐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곧 있을 합창페스티벌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아내가 삼각김밥이나 사 먹으려고 했는데 아내가 과일과 도라지차를 준비해 주었다.
합창제에 기적적으로 참가했다. 도착 후 화장실 청소도구함실에서 옷을 연미복으로 갈아입고, 사복은 청소도구함 물통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후 대기실로 달려가니 바로 10초 후 바로 입장이라고 하신다. 숨을 가다듬으며 최대한 침착하게 걸어 들어가는데, 이마에선 땀방울이 선명하다.
총 세 곡을 마치고 단상에서 내려와 무대 뒤로 다시 향했다. 옷을 갈아입으로 가니 화장실 구석 물통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청바지와 옷이 보인다...
합창페스티벌 곡 '이른 봄 인동초' 중
토요일 16:00,
결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쿵쾅거린다. 60여 킬로미터를 가야 하는데 아무 생각이 없다. 핸들을 잡고 있는 왼쪽 손의 감각마저 없어지는 듯했다.
토요일 17:10,
꼴찌로 도착한 지역대학 대강당에서 다른 분들의 리허설 소리가 들려온다. 무시무시한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모두 아마추어 콩쿨에 잘 못 오신 것 같다. 무시무시한 대포소리는 마치 프로를 연상케 했다.
생애 처음으로 참가하는 콩쿨인 만큼 상을 기대하지는 않았기에 조금은 편안한 마음도 가질 법한데, 다른 분들의 소리를 들으니 한 껏 주눅이 든다.
그래도 우선, 유튜브에서나 뵙던 업계(?) 선배들을 만났다는 생각에 신이 나 90도로 연신 인사를 드렸다. 잠깐 나누는 대화 몇 마디도 내게는 큰 공부이기 때문이다. 또 신기하기도 했다. 이미 유튜브를 통해 많이 알려진 분들이 대거 출연해 연예인을 만난 기분마저 들기도 했다. (인터넷 강의만 듣다가 오프라인 수업에 참여하면 느껴지는 그런 느낌?) 별들의 대화 사이에 끼어버린, 지나가는 운석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들기도 했다.(그만큼 어마어마한 분들이었던지라...)
콩쿨은 다른 대회들과는 달리 싸워서 이겨야 하는 대회는 아닌 것 같다. 그저 내가 준비한 만큼 내 실력대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내가 상대방 보다 나았다면 더 높은 점수를, 상대방 보다 낮았다면 상대적으로 낮은 점수를 얻게 되는 일종의 '자기 평가'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점수에 따른 수상의 유무는 별개의 것이다.
이번 콩쿨 참가자분들은 10년 넘는 경력을 가진 분도 계셨고 최소 수년 이상은 된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타 대회에서 대상 등의 수상을 하신 분도 다수 참가하셨다. 나 같은 올챙이는 물 한 번 휘저어보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다.
토요일 19:00,
내 차례가 되었다. 무대는 생각 이상으로 느낌이 많이 달랐다. 신기했던 것이 리허설 때 연습했던 발성이 본 무대 때 다 달아나고 없어진 것이다. 너무 긴장한 탓에 호흡이 풀리고 힘을 많이 주고 말았다.
수상을 기대한 것은 아니나 실망스러운 연주에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출연자분들께서 처음치고는 잘했다고 위로해 주신 덕분에 마음이 많이 풀렸다.
영상을 못찍어서 선생님께서 주신 녹음본
비록 입상은 못했지만 이번 생애 첫 성악 콩쿨을 통해 크게 배운 것이 있다.
첫 째는, 콩쿨이라는 것이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는 있으나, 결국 나와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과거의 나를 깨우치고 이기지 못하면 결과는 늘 제자리걸음이다. 상대를 분석하는 것도 물론 도움은 되지만 나의 레벨을 올리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둘 째는, 녹화영상을 보고 들을 때의 소리와 직관(직접 관람)을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고 노래를 하는 것이 기본인 성악은 특히 더 그러하다. 가수의 역량과 공간의 차이에 따라 소리가 달라지기 때문에 카메라 마이크로는 재현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좋은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직접 현장에서 들어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번 연주회도 실력이 출중하신 분들이 모인 덕분에 엄청난 공부가 되었다.
다만 참고하고 싶어도, 소리는 아는 만큼 들린다. 공부를 해보지 않고 그냥 가서 들으면 어떤 것이 좋은 것인지 어떤 것이 지양해야 하는 것인지 알기가 참 어렵다. 꼭 콩쿨이 아니라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세상에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들은 내가 아는 만큼 보이거나 통찰력을 더해 조금 더 보이기도 한다. 아는 것이 적거나 없다면 아예 보이지 않기도 한다.
아쉬운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애초에 콩쿨 참가가 올해 목표였던 나는 운 좋게 본선에 진출했고, 무대에 서서 노래를 해 봤다는 것만으로도, 다른 출연자들의 보석 같은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기대 이상으로 만족한다.
평생 콩쿨 한 번 나가 보고 싶은 게 소원이었는데 이제 그 소원을 이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소원이 생겼다. 바로 '입상'이다.
길고 긴 하루가 끝이 났다. 그러나 내일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된다. 끝이 났어도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려고 한다. 지금의 낯선 결과가 쌓이고 쌓여 미래에 큰 밑거름으로 반드시 작용함을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