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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25개월 차, 아데노 바이러스와 싸우다

길었던 싸움,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

by 키랭이

나는 10월에 태어났다. 높고 푸른 하늘과 빨갛게 단풍이 물드는 계절, 책을 가까이하면서도 산책을 나가기 딱 좋은 계절. 무엇하나 흠잡을 데 없는 계절이다. 아빠 엄마도 가을을 무척 좋아하신다.


환절기라는 것을 뺀다면 말이다...


환절기 때는 아빠와 엄마도 고생을 하신다. 인생에서 두 번째로 맞이하게 되는 이번 가을, 환절기 때는 아무 일없이 무사히 넘어가리라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하지만 탄생일과 환절기의 불안한 컬래버레이션은 적중하고 말았다.


'감기'


어린이집에 가니 친구 중 한 명이 며칠 째 보이지 않는다. 집에 무슨 일이 있겠거니 싶었지만 이내 하나둘씩 사라지고 말았다. 엄마는 알림장의 사진을 보고서는 친구들 얼굴이 안 보인다는 것을 눈치채었다. 슬슬 걱정되었다.


병원에서 비타민을 받은 달달콩이


10월 셋째 주 - 잠복기


콧물이 시작되었다. 그 외에 특별한 정상은 없는 듯했다. 엄마가 주시는 콧물 약도 곧잘 먹었고, 밥도 잘 챙겨 먹었다. 콧물이 떨어질랑 말랑 떨어질랑 말랑 줄다리기를 하며 버텨나가고 있었다.


주말이 걸려있었으나 약도 구비되어 있어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기침과 가래도 약을 먹으면 금방 떨어질 것 같았다.


토요일 - 미열의 시작


콧물과 기침이 잡히나 싶더니 갑자기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온몸에 힘이 빠졌고 나는 소파에 앉아 있는 토끼 인형 귀처럼 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소방서에 있는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키랭이~ 달콩이가 또 저번처럼 힘이 없어. 이상해"


"아, 걱정하지 말고 옷 벗겨주고 열 식혀줘. 안아주지 말고. 열 올라가니까. 그리고 묻힌 손수건 여러 장 준비해서 목 뒤랑 상부 등, 팔다리 좀 닦아주면 금방 떨어질 거야. 필요하면 해열제 먹이고. 너무 걱정하지 마. 40도 찍고 안 잡히면 119 바로 불러줘. 출동할게"


스피커폰으로 들려오는 아빠의 목소리를 들으니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아빠의 미세하게 떨리는 긴장감도 살짝 느껴졌다.


엄마도 첫 돌치레 때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에는 고열까지 가지 않게 하겠노라 최선을 다했다.


해열제를 삼켰다. 그 특유의 끈적거리는 식감이 싫었지만, 먹어야 했다. 다행히 해열제는 잘 드는 듯했다.


그렇게 긴장 속의 첫날밤이 지나갔다.


일요일 - 폭풍전야


"띠리리릭"


"아부지~ 아부지~"


아침 9시가 조금 넘으니 당번근무를 마친 아빠가 퇴근해 집으로 왔다. 새벽녘에 다시 시작된 열로 침대에 누워서 아빠에게 인사해야만 했다. 아빠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엄마에게서 손수건을 건네받았다. 아빠는 지난밤 고생했을 엄마를 토닥거리며, 간호에 열 떨어뜨리기에 나섰다.


4시간 간격으로 해열제를 먹으니 열이 폭발적으로 올라가는 일은 다행히 없었다. 러나 새벽이 문제였다. 방 문을 모두 열어두고 아빠와 엄마는 야간근무에 들어갔다.


새벽... 약 기운이 떨어지고 열이 다시 치솟았다. 해열제를 한 모금 마시고, 손수건 마시지를 다시 받기 시작했다. 1시간쯤 지나자 열은 떨어졌고 모두 다시 쪽잠을 청했다.



월요일 - (고열 1일 차) 다른 증상을 동반하지 않은 열


병원을 찾았다. 콧물과 기침은 끝났는데 이유를 알 수 없는 열만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혹시 내일까지 열이 안 떨어지면 병원에 오세요. 다른 검사가 필요할 수도 있어요"


열이 떨어지지 않으면 내일 다시 오라고 하신다.


엄마는 제대로 된 잠을 며칠 째 못 자고 있고, 아빠다 당번 근무 후 계속되는 간호에 지쳐가기 시작했다.


화요일 - (고열 2일 차) 나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다면


아빠는 다시 출근했고, 나의 열은 계속되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큰 병원에 갔을 텐데 길면 5일씩 열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해 하루 더 기다려보기로 하고 병원을 가지 않기로 했다.


홀로 간호에 들어간 엄마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으나 꾹 참고 내색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결국... 밤늦게 40도를 찍고 말았다.

고열에 시달리는 달콩이


수요일 - (고열 3일 차) 조금만 더 힘내자 달콩아


수요일 아침, 퇴근을 하고 돌아온 아빠는 안 되겠다며 병원에 가보자고 하셨다. 아빠와 엄마, 나까지, 우리 세 사람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엄마는 말수가 줄었고 아빠는 눈이 뻘게졌다. 나도 이제 해열제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미지근한 손수건이 내 목뒤에 닿자 짜증을 내기도 했다.


'너무 힘들어요...'


코로나와 독감 검사를 실시했다. 코에 긴 면봉을 찌르는 것이 너무 싫다. 아빠는 웃으면서 나를 꽉 잡았지만 나는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검사결과, 코로나와 바이러스는 아니란다.


"콧물과 기침도 없고... 증상 없는 지속된 고열은 더 큰 병원에 가서 검사해봐야 해요."


목요일 - (고열 4일 차) 깊어지는 고민


아침이 되어도 열은 여전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해열제가 잘 안 듣기 시작한 것. 투약 후 2시간이 지나면 금세 열이 올라갔다. 40도를 찍는 횟수가 빈번해지자 아빠와 엄마는 고민했다.


"병원 가볼까?"

"하루 더 버텨볼까?"


병원에 가도 별다르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고 알고 있었다. 수액과 해열제 등의 처방, 병명진단을 위한 검사 정도일 것이다.


저녁 7시가 되어도 좀처럼 열이 떨어지지 않자 새벽이 두려워졌다. 야간진료를 하는 병원을 검색해 보니 딱 한 군데가 있었다.


"여보세요. 거기 OO소아과죠? 혹시 지금 가면 진료를 받을 수 있을 수 있을까요?"


"네, 마감은 되었는데 병원에 도착하셨을 때 열이 37.5도 이상 나오면 가능하세요."


"아... 가다가 떨어지면 못 받을 수도 있겠네요."


"네, 그렇죠... 해열제를 먹고 오면 그런 경우가 있어요"


아빠 엄마는 고민에 또 빠졌다.

전화를 하기 전엔 분명 39도였는데, 병원출발 직전 37도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금요일 - (고열 5일 차 - 1) 여기가 큰 병원 아닌가요?


새벽 6시, 아빠가 꿈틀대는 소리가 들린다. 며칠 째 잠도 제대로 못 잤을 아빠와 엄마가 무언가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아빠는 7시까지 병원진료 예약을 위해 나섰다. 엄마는 병원 갈 채비를 하고 있다.


3등으로 대기표를 구한 아빠가 집으로 와 우리 두 사람을 데리러 왔다.


도착한 병원에는 생각보다 한산했다. 종합병원 내에 생긴 지 얼마 안 된 곳 같았다. 간호사 선생님이 안내를 해왔다.


"열이 5일 이상 지속되면 더 큰 병원에 가야 할 수도 있어요."


엄마와 아빠가 수군거렸다.


"여기가 큰 병원 아냐? 우리가 가던 곳은 피검사도 안 하던 곳이잖아"


"그러게... 대학병원까지 가야 하나..."


진료실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기도 전에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어머님~ 아기가 협조가 잘 안 되면 진료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진료 시작도 전에 던진 말에 아빠엄마는 좀 당황한 듯했다. 씩씩하게 검사를 받아야 한다! 굳게 마음먹고 아빠 품에 안겼다.


하지만 다짐이 5초도 가지 못했다. 입 안 검사를 하는데 너무 무서워 소리를 지르고 말았고 의사 선생님은 한숨을 쉬며 몸을 돌아 앉았고 검은 모니터 화면만 쳐다보셨다.


"어머님! 검사 전에 애한테 과자 먹이면 안 됩니다. 입 헹구고 다시 할게요"


"아! 죄송합니다. 아무것도 못 먹고 나와서.."


아빠는 사과를 하며 말을 이어갔다.


"달콩아~ 물 마시자~ 옳지 옳지"


물을 꿀꺽꿀꺽 마시니 갑자기 의사 선생님이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아니, 아버님 물 마신다고 안 되고, 검사는 나중에 해야 되니까 애기 데리고 나가 있으세요"


의사 선생님은 엄마에게 계속 설명했다.


"열이 5일 동안 지속되면 큰 병원에 가보셔야 해요. 여기서는 피검사랑 호흡기 검사만 되는데, 아이가 협조가 잘 안 되면 검사가 어려울 수 있으세요"


엄마가 아빠랑 상의했다. 검사를 안 해주려고 하는 느낌이 역력했다.


"진료의뢰서를 가지고 왔는데 왜 여기도 안 받아주지.. 대학병원 응급실 가자"


금요일 - (고열 5일 차 - 2) 응급실

멍멍이랑 이겨내고 있는 달달콩이


결국 오고야 말았다. 코로나, 독감 검사, 수액, 호흡기검사, 피검사, 소변 검사, 심전도, 초음파, 엑스레이까지 할 수 있는 검사는 다 한 것 같다.


엄마는 우는 나를 달랬고, 응급실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은 능숙하게 진료해 주었다. 중간중간 영상도 보며 마음을 달랬다.


엄마는 응급실 밖에 기다리고 있는 아빠와 계속 통화하며 상황을 전하곤 했다.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6시간이 훌쩍 지난 오후 5시쯤이 되어서야 응급실에서 퇴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고열이 끝난 것 같았다!


토요일 - (고열 끝?, 열꽃 시작) 얼마만의 외출인가


배와 가슴부위에 생긴 열꽃

5일 이상 가면 큰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데 아마 마지막 5일이 어제였던 것 같다...


열이 잡혔다.


오늘 감을 따러 가기로 한 날인데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https://brunch.co.kr/@kiii-reng-ee/128

회복한 달달콩이




며칠이 지나 검사결과가 나왔다.


결과는 아데노바이러스.


길고 긴 바이러스와의 싸움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아데노바이러스 감염의 가장 흔한 증상은 상부 호흡기 질환이다. 아데노바이러스 감염은 종종 결막염, 편도염, 중이염, 후두염, 위장염 등을 동반하기도 한다. 특히 어린이의 경우 세기관지염이나 폐렴에 걸릴 수 있으며, 상당히 악화될 수 있다. 아기들의 경우 백일해에 걸린 것처럼 기침을 하기도 한다. 그 밖에도 아데노바이러스는 드물게 뇌염이나 방광염을 유발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염되어도 스스로 치유되지만, 면역결핍증을 가진 사람들은 감염에 의해 사망하기도 하며, 매우 드물지만 건강한 사람도 감염에 의해 사망에 이를 수 있다.

<출처 : 나무위키>



사랑하는 딸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

달콩아,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와 싸우느라 얼마나 고생 많았니. 아빠 엄마가 옆에어 도움이 많이 못 되어 주어 미안해. 앞으로도 싸우게 될 수많은 시련도 아빠와 엄마가 있는 동안은 끝까지 함께 할 거야. 너는 앞만 보고 걸으렴. 가끔, 아주 가끔 물음표가 생기면 뒤를 돌아보면 돼. 사랑해 달달콩


아빠의 공간

드디어 길고 긴 감기 바이러스와의 전쟁이 끝이 났다.

물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다시 다른 감기와 싸우는 중이다.


당번 근무 후 이틀을 쉬는데, 근무 때 실종자 수색으로 하루종일 산을 타고, 회복 후에는 감 수확에 이어 야간근무 들어갔다가 다음날에는 장인어른이 모셔져 있는 납골당까지 가며 나의 몸도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하루종일 아이의 회복을 위해 잠시 쉬지도 못하고 아이를 봐 온 아내에 비할 바 못 된다.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이 가질 않는다.


갓 두 돌이 지나간 딸아이를 키워보니 세상 모든 부모님들이 다 존경스럽고, 아이들이 대견하기만 하다.


육아를 통해 사랑과 배려, 인내와 감사를 배운다. 늘 느끼지만 아이를 키우는 육아(兒)는 나의 성장을 돕는 육아(我)이기도 한 것 같다.


회복 일주일 후 달달콩
회복 일주일 후 지나가던 강아지와 함께



PS. 국립과천과학관 앞 주차장에서 자고 있는 아이와 함께 하며, 3일 동안 써내려 가던 긴 글을 이제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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