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아침, 시사(時祀)가 있어 아버지가 계시는 곳으로 곧장 올라갔다. 예전만큼 제사의 규모도 크지 않고 찾는 이도 많이 없어져 이제 아버지와 오붓하게 산을 올라 간단하게 지내는 것으로 갈음한다. 산을 오르면 숨은 차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른다. 나이 40이 다 되어가는 아들 녀석이 나뭇가지에 얼굴을 찔리거나 밤가시에 찔려 아기 고라니 같은 비명을 지르면, 아버지는 껄껄껄 웃으며 놀리곤 한다.
오미자(五味子)
시사(時祀)를 마치고 집 뒤에 있는 카페에 가 보았다. 차를 마시며 자연을 감상하고, 그림도 감상할 수 있다. 바테이블에 아버지와 나란히 앉아 창 밖을 바라보니 한 폭의 그림이 펼쳐진다. 사모님께서 내어주신 따뜻한 오미자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사모님은 글쓰기와 노래를 즐겨한다는 나에게, "나이가 들어서까지 할 수 있는 좋은 취미생활을 잘하고 있네요"라며, 용기를 주셨다.
인생은 단맛만 있지 않다. 인생은 오미자와 같다. 달달하다가 짤 때도 있고, 시큼하다가도 쓸 때도 있다. 한 번은 감당하기 어려운 매운맛 공격에 당할 수도 있는 법. 인생은 언제나 꼬부랑길이다. 그래서 늘 준비를 해야 한다. 언제 어떻게 써 먹힐지 모르는 생존기술을 평소 꾸준히 익혀 꼭 필요할 때 써먹어야 하는 것이다.
입 안 가득한 오미자(五味子)의 향을 다시 한번 음미하며, 취미의 중요성. 준비의 중요성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문재(文才)
40만 킬로가 넘어버린 아버지의 차(車)를 고치러 가기 위해 남은 차(茶)를 마저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웅해 주시는 사모님께 인사드리며 돌아서는데 익숙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언제 왔어?" 이호신 화백님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조카를 맞아주시듯 환한 미소로 걸어 나오시는 화백님을 보니 반갑기도 하면서도... 무언가 이전과 다른 느낌을 받았다. 마치 연예인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 아버지께서 브런치스토리에 올라온 글을 화백께 보여주었는데 그 글을 읽으시고는 너무 감사하게도 자신의 책을 선물해 주신 적이 있다. 그 후에 감사 인사를 드릴 겸 찾아뵈려고 마음은 계속 먹고 있었는데, 게으른 나는 아버지만 뵙고 쏙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우연히 뵙게 된 데다가 화가이자 다수의 책을 편 출간작가를 만난다는 설렘에 흥분을 한 것이다.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지금 느끼는 감사와 감동을 잘 몰랐을 수도 있겠다 싶어 절로 감사가 나왔다.
10분 남짓한 시간 동안 화백께서 글쓰기에 대한 견해와 가르침을 들려주셨다.
"쉬지 말고 글을 계속 써봐. 계속 쓰다가 그것이 모이면 나중에 책이 될 수 있어. 아주 훌륭한 취미야. 이제 보니까 너, 문제가 많은 놈이네~"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들다가 순간 '문제'가 많다셔서 흠칫 놀랐다.
"네?"
"아~ 문재(文才) 말이야. 문재(文才)~"
"아~ 하하하하하"
화백님의 묵직한 농담에 아버지와 나는 빵빵 터지고 말았다.
화실(花實)
화백께서 지금까지 아무도 공개하지 않았다고 하는 그림을 보여주시고자 화실로 안내해 주셨다. '살다 살다 내가 언제 화실에 다 들어가 보지?'라는 생각을 하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따라 들어갔는데,
장관이었다.
내 키에 두 배가 넘는 그림이 눈앞에 두 점이나 펼쳐져 있었다. 지리산 천왕봉과 눈이 마주쳐 한 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차에 화백께서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서 보라신다.
아버지와 나는 한 사람의 땀과 열정이 가득 배어 있는 그림 앞에서 다시없을 추억을 남기며 화실을 빠져나왔다.
전수(傳受)
그리고 또 하나 줄 것이 있다며 갤러리 안으로 들어갔다. 화백님은 자신이 쓴 다른 책 한 권을 뽑아 들었다. 시원한 필체로 사인을 해 주시며 봉투에 예쁘게 담아 주셨는데, 이제 감사하다 못해 머리가 어지러워 쓰러질 지경이었다. 제대로 된 책 한 권 내보지 않은 병아리 같은 내게 글을 쓰는 사람을 만나 기쁘다며, 이렇게나 아낌없이 내어주시니 앞으로 무엇으로 갚을까 싶었다.
책을 내어주시며, 어린아이 같이 즐거워 하시는 화백님이다.
"빼앗기는 즐거움이 있네, 허허~ 읽을 사람에게 책을 빼앗기는 건 정말 큰 즐거움이야"
내가 그날 받은 것은 단순히 책 한 권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월과 세월을 잇는 다리이며, 삶에서 삶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만나는 이 만남의 장을 통해 나는 한 사람의 인생을 선물로 받았다.
글을 쓰는 것을 부끄러워 않는다. 익명으로 글을 쓰라는 관점도 분명 존재하고 틀린 말은 아니지만, 글을 쓴다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용기를 얻고 또 조심하게 된다. 글을 쓰는 사람이 가져야 할 덕목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배우고 나만의 기준도 세워 나간다. 이것의 나의 관점이다.
글을 쓰며 내면의 변화는 느끼고 있었지만, 글을 쓴 뒤 받는 이런 달콤한 선물은 글을 쓴다고 알리지 않았다면 받지 못했을 것이다.
얼마 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님과 잠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나는 글을 쓰는 게 취미라고 말씀드렸고 교수님은 그 자리에서 더 많은 생각들을 공유해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