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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랭이 Dec 15. 2023

순수(純粹)에게 내려진 유죄선고

직장 상사(최종보스)와의 식사자리

순수(純粹) : 다른 것이 조금도 섞이지 않음
[한자사전]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낯선 남녀가 소개팅 자리에서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가장 빠르게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공통된 관심사를 찾는 것이다.


"음악 좋아하세요...?"

"네.. 전 클래식.."

"아..  저는 록(Rock) 음악..."

"네..  그럼 빠이빠이..."


직장에서 나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윗사람과 친해지기 위해서도 관심사 탐색이 한몫한다. 윗사람이 골프를 좋아하면, 골프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면 도움이 된다. 다만, 억지로 쥐어짜 내어 이야기를 만들어 내면 밑천이 금방 드러나 곤란해지기도 한다.


나와 윗사람의 취미나 관심사가 비슷하다면 큰 노력 없이도 빠르게 가까워질 수 있다. 이때 주의할 것은 내가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는 상대방이 말을 많이 할 수 있게 적절한 대답과 호응, 질문을 섞어주는 것...



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직장에서 잘 만나기 힘든 아주아주 저 높이 계시는 분과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소방의 날 행사 때 쓰인 영상을 제작했는데, 감사의 의미로 초대받은 것이다. 다들 왜 그런지, 그 분과의 자리를 어색해하며 멀리멀리 도망치는 게 보였다.


나는 체중이 많이 나가는 '덩치'이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고 자리를 고수했다. 휴대폰은 매너모드로 바꾸고, 대화모드는 순수(純粹)한 새내기 직장인 모드로 바꿨다. 시들어버린 액면가 때문에 모드변환에 상당한 시간이 걸렸지만, 목소리 톤을 올리는 것으로 겨우 갈음했다,


<직장인 대화 모드>

눈빛은 "네, 당신은 말씀하세요."

귀는 "(쫑긋, 쫑긋)"

입은 "호응과 제 이야기를 8:2의 비율로 섞겠습니다"

손은 "부담스럽지 않게 호응용 손뼉 칠 때만 쓸 거고요. 너무 놀랐을 때는 입을 가릴 때 잠시 쓰겠습니다"


다행히 대화 5분 만에 문화, 예술, 인문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직급과 자리 때문에 오해한 게 죄송할 정도로 젊은 직원들과 거침없이 대화를 할 수 있는 아주 열린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다 보니 배울 것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어 좌완과 우완, 그리고 턱 주변으로 닭살도 좀 돋았었다.


그분의 친절한 배려 덕분에 긴장이 어느 정도 풀리고, 약간 들떠서 글쓰기를 좋아한다는 말을 했더니 아주 흥미로워하시며, 덕담을 몇 마디 해주셨다.


그러면서 "제 목표 중에 하나가 책을 출판하는 것입니다."라고 순수(純粹)한 포부를 내비쳤다.


꿈.,.


그것은 꿈의 대화였다.


붓과 붓이 만나는,

펜과 펜이 부딪히는,

소리와 소리가 어우러지는,


대화는 점덤 예술이 되어갔다.

마음을 알아주는 그분이 너무 감사했다. 그리고 즐기까지 했다.




그런데 옆에 있던 감찰담당자님의 판결문이 낭독되었다.

"사 때 영상 잘 만들었대~  소질이 있는데..? 혹시 유튜브 하는거 아니가?"

"네? 아 취미로..가족들 영상 만들고..."

"그정도가 아닌데? 수입생기면 바로 이야기해라이."

"네..."

"그리고 책도 나오면 바로바로 딱 이야기해라이"



농담이셨지만 그것은... 그것은...

순수(純粹)에게 내려진 유죄선고였다.


'아... 영상 만들어달래서 4개월동안 40번을 검토받고 했는데... 글 써달래서 3시간만에 인터뷰자료 만들었는데...'


그렇게 꿈의 대화는 원고와 피고의 대화가 되었고,

나는 정신이 번쩍 들며 접시 위에 담긴 음식을 입속으로 마구 욱여넣었다.


포크를 쥐고 있던 오른 손이 조용히 말했다. "저기여... 그만 말씀하시고 식사나 하시죠"


다행인지 불행인지 제11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는 나를 많이 지나갈 것 같다.




오늘의 교훈...


직장에서는 일만 열심히

집에서는 육아만 열심히

글은 조용조용 열심히♡





이 글은 글쓰기를 하며 겪었던 저의 에피소드를 기록한 것이며, 특정인에 대한 비난의 목적이 1도 없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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