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키랭이 Sep 05. 2023

인생 23개월 차, 레트로(retro) 감성에 취하다

아기가 되고 싶다


송골송골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선선한 바람에 식어가는, 아빠 엄마가 열어놓은 문틈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솔솔 들어오는, 집 앞 광장 분수대를 보는 것보다 날아가는 새를 보는 것과 떨어지는 낙엽을 밟는 것이 좋은 이른 가을이 찾아왔다.

태어나 두 번째 맞는 여름도 나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내가 세상에 태어난 가을, 가을이 좋다. 여름 내내 냉탕과 온탕을 왔다 갔다 하며 여름감기에 걸려 고생한 탓도 있지만, 여름 탓을 하기보다는 가을이 왠지 그냥 좋다.


8월에 젖었던 찌뿌듯한 몸을 시원한 바람에 씻어내듯 아빠는 오늘 작은 방 청소를 시작했다. 아빠는 가끔 청소를 할 때 구조를 조금씩 바꿔가며 몇 시간씩 대청소를 하신다. 오늘이 바로 그날인 것 같다. 한 번 방에 들어간 아빠는 나올 생각을 안 하신다.


내가 이따금 놀러 가면 엄마가 "이리 와 이리 와~ 어우~ 여긴, 아빠가 청소하시는데 콩이가 들어가면 위험위험해요" 하면서 나를 다시 데려간다.


엄마랑 놀다 보면 금세 아빠 생각이 다시 난다. 가끔 훈육을 위해 따끔하게 말씀하실 때도 있지만 아빠만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아빠랑 오래 있고 싶다.


엄마가 빨래를 위해 다용도실에 들어갔다. '이 때다!!!' 조심조심 아빠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아빠~" 아빠가 나를 보더니 "달콩이 또 왔어?" 하며 웃으신다. 아빠 옆에 앉았다. '음~ 뭐 재밌는 거 없나... 어! 찾았다'

"이거~ 이거~"


"어? 콩아~ 이거 콩이가 어렸을 때 베고 자던 베개야. 넨네 할 때 이거 이렇게 베고 잤어. 기억나니?"


"응"


좁은 공간을 비집고 베개를 베고 누워보았다. 바닥은 딱딱하지만 양 옆으로 머리를 잡아주는 듯해 왠지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이걸 베고 잤다고? 히히히' 복도에서 엄마가 나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 엄마에게 베개를 가지고 가 자랑했다. 엄마는 환하게 웃으시면서 "넨네 할 때 쓰던 거네~"하고 말씀해 주셨다.


다시 아빠에게로 돌아가는 길, 복도에 아빠가 꺼내놓은 박스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영~차!' 꽤 묵직한 박스 안에는 예전에 쓰던 것으로 보이는 장난감이 있었다. 엄마는 그런 나를 보더니 중고로 판매할 거라고 두라고 했지만, 나는 조립된 모습을 한번 더 보고 싶었다. 내 방에 잠시 들른 아빠에게 부품을 하나씩 가져다주며 조립을 해달라고 했다.


아빠는 부품을 가져다주는 나를 계속 칭찬하며 하나씩 다 가져다 주기를 기다렸다. 모든 '파츠'가 다 모였고, 아빠는 조립을 시작했다. 그리고 1.5v 건전지 3개까지 교체하고 나니 어렸을 때 누워서 보던 모빌이 탄생한 것이 아닌가.


푹신한 침대 위에서 젖병을 손에 쥐고 공중에 떠다니는 친구들을 보며 싱긋싱긋 웃다가 잠들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3개월이라니... 세월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아침에 중고로 팔려나갈 '꼬꼬'를 발견해 데리고 있었는데, 베개와 모빌, 꼬꼬까지 한데 모이니 1여 년 전 그때 그 감성이 온몸을 휘감았다.


지난 23개월 동안 마치 폭포처럼 쏟아지는 정보를 받아들이고 익히느라 쉴틈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만나는 것들 마다 새롭고, 듣는 것마다 새롭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 속에서 진정한 '나'라는 주체가 형성되어 가는 것이겠지만 때로는 진정한 '나다움'을 찾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다.


내가 인지할 수 있는 기억은 몇 해가 더 지난 후 부터겠지만, 지금의 소중하고 따뜻한 기억은 내가 인지하지 못해도 나의 무의식 속에 남아 내가 앞으로 살아갈 수많은 시간 동안 나를 지켜주고 나를 살게 해 줄 원동력이 될 것이다.


때론 느리게, 때론 가만히 뒤를 돌아보며 추억을 간직하고 싶다. 시계방향으로만 돌아가는 세월 속에 가끔 나의 과거도 토닥여 주고 싶다.


아빠와 엄마와 함께 할 수많은 시간도 설레지만, 함께한 소중한 시간도 지금 담아두고 싶다. 잊히지 않도록 말이다.





 사랑하는 딸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

딸아, 많은 사람들은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고 미래를 바라보라고 이야기한단다. 그것은 틀린 말은 아니란다. 과거에 있었던 과오에 얽매이면 현재를 바라보는 눈이 흐려지고 미래까지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지. 하지만 아름다웠던 추억은 소중히 간직해 주었으면 해. 우리가 함께 나눈 소중한 시간은 이제 두 번 다시 재현할 수 없는 조각들로 남겠지만, 그 작은 조각들은 우리가 주저앉을 때 우리를 힘껏 일으켜 줄 분명 훌륭한 버팀목이 될 거야. 사랑한다. 내 딸.




아빠의 공간


어젯밤, 24시간 근무를 서다가 아내에게 카톡을 한 통 받았다. 원래 쓰던 베개를 밀어내고 아기 때 쓰던 베개를 베고 누워버렸단다. 모빌까지 해달라며...


아기의 모습을 모방하며 흉내 내는 모습을 보니, 혹시 어리광을 부리지는 않을까 걱정은 되었다. 어떤 영상을 보니 동생이 갑자기 생기면 동생 따라 하며 부모의 관심을 끌려고 하데, 혹시 그런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대로 잠시 두고 싶다. 아이의 귀여운 모습을 잠시 눈에 더 담아 두고 싶다. 갤러리에 저장된 아이의 어렸을 적 사진을 보면 벌써 그리워지는 것은 어쩌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그 시간에 대한 아쉬움 때문일까. 지금은 지금대로 예쁘고 사랑스럽다.


부캐로 '아기'를 선택한 딸아이가 혹시 부캐를 빨리 내려놓지 않으면 훈육을 할 생각이지만, 잠시만... 잠시만... 놀게 두고 싶다. 덕분에 나도 아내도 감성에 젖으며 서로를 위로하는 따스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덕분에...


중고로 팔려 나가려던 꼬꼬도 이렇게 목숨을 건진 것이 아닌가?




매거진의 이전글 인생 22개월 차, 2 어절로 말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