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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뫈 Aug 29. 2024

노트북이 안 켜지다

3년 생활 중 가장 아찔했던 상황

"전쟁에 나가는 군인이 총을 두고 오면 되겠냐?"


학생 때 샤프나 볼펜을 안 가져와서 짝꿍에게 빌리면 선생님들은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공부가 본분인 학생에게 필기구는 총칼과 같았다.


기자의 총은 무엇이냐고 물으면 당연히 노트북이라고 답하겠다. 언제 어디서나 노트북을 펼치기만 하면 그곳은 기자실이 된다. 군대에서 자대배치를 받으면 내 앞으로 나오는 총을 애인이라고 부르듯, 기자에게 노트북은 애인 같은 존재다.


총과 노트북의 다른 점은 뭐가 있을까. 확실한 하나는 총은 기능고장이 났을 때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범위가 존재하는 반면 노트북 고장은 내 능력 밖의 일이라는 거다.

비 온다고 해서 장화를 신고 갔었다. 광주는 맑았다.

지난주 광주로 출장을 갔을 때였다. 경기장에 도착하니 갑자기 노트북 충전이 되지 않았다. 노트북 재부팅도 해보고, 충전기도 이리저리 만져봤지만 기존에 채워져 있던 배터리만 빨리 닳을 뿐이었다. 무더운 날씨인데도 등골이 오싹해졌다. 더워서 나는 땀과 식은땀이 구분되지 않았다. 그렇다. 기능고장이었다.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경기 선발 명단이 문제가 아니었다. 출장 전체를 날려버릴 수 있는 일이 생긴 거다. 


일단 데스크에 보고하고 고치려고 계속 노력했다. 충전기 위치도 바꿔보고 이것저것 눌러보고 최선을 다했다. 도시락도 안 먹었다. 밥을 먹을 때가 아니었다. 그러다 킥오프 15분 전 충전이 되기 시작했다. 아,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싶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저녁을 먹기 위해 도시락을 가져오자 다시 충전이 안 됐다. 노트북은 몇 분 정도 버티더니 이내 꺼졌다. 아.

폭풍이 오기 전이 가장 맑다(?)

데스크에서는 부담 갖지 말고 경기 보고 기자회견은 녹음하라고 하셨다. 마음이 불편했지만 사람이 간사한 게 아무런 신경도 안 쓰고 경기를 보니 금세 긴장이 풀렸다. 기자회견에서도 받아 적을 내용이 없으니 스마트폰으로 녹음 기능만 켜두고 신나게 질문했다. 누가 보면 쟤는 놀러 왔나 싶었을 거다.


회사에 보고하고 노트북을 받니, 새로 사니 어쩌니 하다 결국 우선 충전기를 사기로 했다. 충전기가 문제였다는 게 내 판단이었다. 큰돈을 쓰고 싶지 않은 마음이기도 했다.


다행히 새 충전기를 꽂으니 충전도 되고 전원도 켜졌다. 지금 이 글도 광주 출장에서 나를 당황하게 했던 노트북으로 쓰고 있다.

앞으로 광주에 못 오는 게 아닐까 싶었다.

부장님께서는 당신은 2008 베이징 올림픽 출장 당시 노트북이 고장 난 경험이 있다면서 나를 위로하셨다. 광주도 아찔한데 말 한마디 안 통하는 외국에서 이런 일을 겪으면 대체 어떤 기분일까. 돌아보니 지난 4월 카타르 출장 때 타 매체 선배 노트북 화면 받침이 깨져서 현지에서 수리를 맡긴 적도 있다. 하루 만에 고치기는 했지만 그전까지 선배는 노트북에서 손과 눈을 떼지 못했다.


그나마 광주에서 이런 일을 겪었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왜 군대에서 총을 애인 다루듯이 하라는지 알겠다. 노트북을 더 소중이 다뤄야겠다는 교훈을 얻은 출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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