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명절
부모님이 살아계셨을 때, 명절이면 늘 삼각형을 그리며 움직였다. 울산에서 서울, 서울에서 해남, 다시 울산으로. 국토의 세 꼭짓점을 잇는 긴 여정이었다.
양가가 서로 먼 지역에 계시고, 우리도 양가와 멀리 살고 있어서 어쩔 수 없는 동선이었다. 당시에는 경부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 남해고속도로 밖에 없었다. 명절마다 고속도로는 차들로 꽉 막혔다. 그래서 우린 주로 새벽에 출발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은 잠든 채 우리에게 안겨 뒷좌석에 눕혀졌다. 앞 좌석과 뒷좌석 사이에 디딤판을 놓고, 이불을 펴면 작은 침대가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주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당시엔 뒷좌석 안전벨트에 대한 안전의식이 지금보다 높지 않았다.
그렇게 달리다 보면, 아이들이 눈을 뜰 무렵이면 거의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덕분에 아이들에겐 울산과 서울, 해남이 모두 한 시간 거리쯤 되는 가까운 동네로 여겨졌을 것이다. 자고 일어나면 도착해 있었으니까.
나는 어릴 적부터 명절에 친척들 만나는 것이 썩 반갑지 않았다. 겉으로는 표현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늘 불편했다.
설날과 추석에만 만나는 사이, 대화가 길어질 리 없었다. 처음에 서로 안부 인사 몇 마디를 나누고 나면, 별로 할 얘기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가끔 만나는 친척들과 얘기할 만한 공감대가 없었다.
"공부는 잘하냐?", "여자 친구는 있냐?", "군대는 언제 갈 거냐?"
정해진 질문에 어색한 미소와 그럴듯한 대답을 하던 기억이 선하다. 어쩌다 정성껏 이야기해도 진심으로 들어주는 것 같진 않았다.
나는 속으로 '그럴 거면 왜 물어보셨을까?'라고 반문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친척분들도 할 얘기가 없어서 그러셨을 것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몇 해 뒤, 큰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그런데 나는 부고를 받지 못해 전혀 그 사실을 몰랐다. 그 큰어머니 아들인 사촌형님이 느닷없이 대뜸 소리부터 지른 전화를 받기 전까지.
부고를 받지도 못했다는 나의 얘기는 전혀 듣지를 않고, 그냥 일방적으로 본인 말만 하고 끊으셨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친척들과의 관계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부모님도, 큰아버지, 큰어머니도 이제는 모두 세상에 안 계시니, 명절에만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던 관계를 굳이 이어나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지금은 부모님 제사도, 차례도 지내지 않는다. 그동안 홍양이 20년 넘게 차례와 제사를 챙겼다. 이제는 홍양도 그런 의무에서 자유로워져야 할 때다. 부모님 기일에는 그저 마음속으로만 조용히 기린다. 기리는 마음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혹자는 이런 내 선택이 못마땅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구나 하고 넘어가 주시면 좋겠다.
다음 주는 어머니 10주기이다. 아버지는 11월이 되면 23주기이다.
참 세월이 빠르다.
이제 명절이면 해남에 계신 장모님께만 다녀온다. 장모님도 예전엔 수십 년간 제사와 차례를 준비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을 것이다. 요즘은 장인어른 제사도, 명절 차례도 지내지 않으신다.
제사를 지내든 지내지 않든, 중요한 건 방식이 아니라 마음으로 기리는 일일 것이다.
순천-영암 고속도로가 뚫린 이후, 해남까지 시간이 짧아지고, 운전도 편해졌다.
명절에 찾아 뵐 어른이 계신다는 건 큰 복이고,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