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96년에 결혼하였고, 이듬해 97년 10월에 아들을 얻었다.
아들을 놓은 그 해말에 IMF 사태가 왔다.
환율은 한때 2,000원까지 갔고, 아직도 가장 기억에 남는 분유 파동이 있었다.
갓 태어난 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게 분유 파동은 정말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마트를 갈 때마다 분유부터 찾았고, 살 수 있는 최대치를 구입하였다.
알다시피 IMF시절에 많은 기업들이 무너졌다.
다행히 내가 다니는 회사는 수출이 주력이어서 고환율 덕분에 그나마 큰 피해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IMF 사태로 집값이 상당히 많이 떨어졌다.
우리는 회사 근처인 용인 수지에서 20평대 아파트를 장만할 수 있었다.
결혼하고, 2년 만에 첫 내 집을 마련한 것이다.
그 사이 99년 10월에 둘째로 딸을 얻었다.
이렇게 평온히 지내고 있다가 99년 11월에 우리에게 큰 사건(?)이 닥쳤다.
내가 신입일 때 6개월간 근무한 울산으로 근무지가 변경된 것이다.
용인에 있는 사무실을 울산으로 통폐합한다는 회사 지침이 내려왔기 때문이다.
첫째는 태어난 지 만 2년이 조금 넘었고, 둘째는 1개월이 조금 넘은 시점이었다.
이 때문에 우리에게 주말부부 생활은 불가능하였다.
당시 울산은 석유화학 공장들에서 나오는 매연으로 공기가 좋지 않았고, 2002년 월드컵 경기를 개최하면서 많이 개선되었다.
지금은 울산 생태도시라는 슬로건을 내세울 정도로 많이 좋아졌다.
울산으로 가서 전세를 알아보면서 최우선 조건은 그나마 공기가 좋은 동네이었고, 그래서 선택한 지역이 "호계"라는 동네이었다.
지금은 많이 도시화되었지만, 당시는 주변에 논밭만 있는 시골 분위기였다.
홍양은 전세계약 아파트를 직접 보지도 못하고, 상상만 하면서 울산으로 오게 되었다.
다행인 건 이사 와서 홍양이 그 지역과 울산을 싫어하지 않았다.
2000년 1월 초에 홍양은 두 아이들과 함께 울산공항에 도착하였다.
두 아이들에게 비행기는 처음이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두 아이들은 울어재끼기 시작하였고, 급기야는 둘 다 동시에 똥까지 쌌다고 한다.
기압 차이로 귀도 아프고, 비행기 소음 때문에 놀라서 그랬을 것 같다.
둘째는 기저귀를 차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지만, 첫째는 기저귀도 없는 상태에서 무방비로 싼 것이다.
승무원의 도움으로 응급 처치만 하고 내렸다.
지금이야 추억으로 웃으며 얘기하지만, 그때 홍양은 얼마나 당황하고 황당했을까?
이 지면을 빌어 당시 대한항공 승무원님께 사과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새로 구한 전세 아파트는 당장 어린아이들을 씻기고, 정리해 줄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우린 앞서 얘기한 삼겹살 부부 집으로 가서 애들을 씻기고, 그 집 애들과 놀게 하였다.
우리는 똥 얘기를 안주로(?)하며, 함께 한잔하였다.
홍양은 애들 똥 스트레스(?)때문에 계속 마셨고, 삼겹살 부부도 옆에서 부추기면서 좋은 알코올 팀워크(?)를 보여 주었다.
나도 그 팀워크에 합세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전세 아파트는 다음 날 입주하기로 하고, 그날 그 집에서 잤다.
약 1년 후에 우리는 수지 집을 팔았다.
지금은 수지 집값이 많이 올라서 아깝다고 생각할때도 있지만, 그 당시 홍양은 울산에서 정착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보자는 의지가 강하여서 어쩔 수 없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입학할 쯤에 우리는 울산 시내 쪽에 아파트 분양을 받았다.
그리고, 우린 지금도 울산에서 살고 있다.
이제 회사는 다시 생산 현장만 울산에 두고, 나머지는 분당으로 옮겼다.
지금 홍양은 울산, 나는 서울에 있는 주말부부이다.
지금 홍양은 울산에서 조그마한 영어학원을 운영하며 직접 가르치고 있다.
울산대학교 평생교육원부터 시작하여 호주, 하와이에 연수까지 다녀왔다.
생활력은 존경스럽다. 이건 다음에 자세하게...
사족)
삼겹살 부부도 우리와 같은 처지로 우리 보다 한 달 먼저 울산으로 이사하였고, 몇 년 후에 회사를 옮기면서 경기도 일산으로 이사하였다.
지금도 삼겹살 부부와 1년에 두 번 정도 함께 주말에 1박 여행을 하면서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