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FP 아내와 ISTJ 남편이 사는 얘기

33년 차 출근길에 단상

by namddang

대학원 석사 마지막 학기, OO회사에 다니던 선배가 학교로 리크루트를 왔다. (개인 정보는 모두 땡땡 처리한다.)


"이번에 연구원 뽑는데 너 한번 지원해 봐."

난 이미 가고 싶은 회사에 지원한 상태라 대답은 미적지근했다.

"글쎄요. 저는 이미 **회사 지원했는데요."

"야, 일단 지원해. 나도 건수 좀 채워야 해."


그렇게 반쯤 등 떠밀리듯 원서를 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면접장에 도착했더니 느닷없이 영어와 한자 시험을 보란다. 사전 예고는 1도 없었다. (나중에 입사하고 알았는데 내가 꽤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특히 한자는 국민학교 - 그 당시는 그렇게 불렀다- 시절 배운 천자문 덕분이었다. 인생에 쓸모없는 공부는 없다는 교훈을 다시 한번 새겼다. TMI지만, 소소한 내 자랑^^)


급작스러운 시험과 면접을 끝낸 뒤, 며칠 후에 대표이사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축하 전보를 받았다.

지금처럼 알림이 '띵똥' 뜨던 시대가 아니었다. 그 시절 합격 소식은 전보로 받았다. 전보에는 축하 문장과 함께 'oo일에 다시 울산으로 집합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정작 내가 원하던 **회사로부터는 탈락 통보를 받았다. 그렇게 나는 울산의 00 회사로 향하게 되었다.

울산에 도착하자마자 한 달 교육이 있다며 기숙사를 배정해 주었다. 물론 이 얘기도 미리 전달받은 바 없어서, 그날 회사 근처에서 세면도구와 속옷 몇 장을 부랴부랴 사야 했다. 그날 나를 비롯한 동기들의 표정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었다.


입사하고 얼마 뒤, 그 선배와 소주 한잔을 기울이며 툴툴거렸다.

"선배님, 저는 선배님께 사기당했습니다. 이런 회사인 줄 몰랐습니다."

"시끄러워 인마. 곧 너한테 딱 맞는 아이템이 생길 거야. 그냥 다녀."


그렇게 시작한 회사를, 나는 이번 달로 33년 차가 되었다.

어떻게 버텼냐고 묻는다면, 대단한 비밀은 없다.

그 선배 말씀처럼 적성에 맞고 재미있는 일들을 하나둘 처리하면서 무엇보다 정이 붙었고, 규칙적으로 다녔을 뿐이다.

회사 생활이라는 장거리 마라톤에서 앞서 나가진 못했지만, 뒤처지지도 않기 위해 꾸준히 페이스를 유지하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아무리 달리는 스피드가 떨어졌다 해도 걸을 수는 없다. 그것이 규칙이다. 만약 자신이 정한 규칙을 한 번이라도 깨뜨린다면 앞으로도 다시 규칙을 깨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레이스를 완주하는 것은 아마도 어렵게 될 것이다.

매일 달린다는 것은 나에게 생명선과 같은 것으로, 바쁘다는 핑계로 인해 건너뛰거나 그만둘 수는 없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빈틈없이 단련하는 것."

나는 이 문장을 읽을 때마다 자연스럽게 ‘달리기’를 ‘회사 생활’에 대입해 본다.

하루키에게 달리기가 삶의 리듬이라면, 나에게는 출근 행위가 오랜 시간 지켜온 리듬이었다.

거창한 목표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멈추지 않기 위해, 흐트러지지 않기 위해 매일 내 속도로 달려온 것뿐이다.

회사에 올인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업무를 느슨하게 하지도 않았다.

홍양과 아이들에게도 최선을 다 했다고 얘기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소홀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내 생각엔^^)

​내가 회사 생활을 이어온 이유와 하루키가 달리기를 계속하는 이유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제 내년이 될지, 혹은 그다음 해가 될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회사는 나에게 말할 것이다.

"그동안 수고했으니, 이제 쉬세요."


하프 마라톤을 완주할 때면 '드디어 끝냈구나, 그래도 중도 포기는 안 했네'라는 안도감이 찾아온다.

그런데 회사라는 마라톤의 마지막 피니시 라인 앞에서는 어떤 감정이 찾아올까? 기쁨? 허전? 아니면 둘 다?


얼마 전 종영한 '김 부장 이야기'에서 제2의 인생을 사는 김 부장을 보며,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깨달았다.


나도 곧 제2의 인생을 준비해야 한다.

이미 늦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급하게 준비한다고 될 것도 아니다. 천천히 지금까지 했던 나의 속도로 새로운 리듬을 만들려고 한다.


브런치에 글을 쓰는 일 역시 그 과정의 일부다.

30여 년간 유지해 온 나만의 페이스를, 이제는 다른 길에서도 이어가기 위한 작은 연습이다.


추신)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갑자기 '벌려놓은 일은 마무리하고 나가야 할 텐데..'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다.

이런 생각 위험한데... 내려놔야 한다.

나 말고도 할 사람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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